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수리 Nov 09. 2015

소희

컵라면과 나쁜 놈

샘.

며칠 전에 전남친을 만났어요.

야자 끝나고 집에 갔는데 집 앞에 걔가 서 있더라고요.


샘, 알죠? 우리 얼마나 안 좋게 깨졌는지.


걔 졸라 나쁜 놈이에요. 툭하면 잠수타고 제 연락 다 씹고. 그래서 별별 걱정하다가 찾아가면 얼굴에 인상 팍 쓰고선 그래요. 게임했어. 축구했어. 잤어. 귀찮아. 몰라. 왜?

그런 놈이에요. 자존심 상해요. 아마도 저 혼자 좋아한 거 같아요. 쪽팔리게.


근데 걔가 우리 집 앞에 와 있었어요. 전 조금 놀랐죠. 걔가 말했어요.  


“배고픈데 컵라면 먹을래?”

“아니.”

“그럼 나만 먹지 뭐.”


이런 식이에요. 맨날 지 멋대로예요. 걘 나를 끌고 편의점에 갔어요. 그리고 800원짜리 컵라면 하나를 집었어요. 맨날 그것만 먹어요. 그게 제일 맛있대요. 질리지도 않나봐요.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붓고, 우린 편의점 앞에 앉았어요. 전 그냥 입 꾹 다물고 가만히 앉아 있었죠.


컵라면이 익을 동안 우린 암말도 안 했어요. 웃긴 게, 걔는 지가 찾아온 주제에 똑같이 입 다물고 가만히 있는 거예요. 샘, 진짜 짜증 나지 않아요? 뭐하자는 거예요? 제가 물었어요.


“웬일이야?”

“그냥. 너 요즘 좀 힘들다며?”

“그게 뭐? 너랑 상관없잖아?”

“그냥.”


날 언제부터 신경 썼다고. 진짜 어이가 없었어요.

걔가 젓가락을 가르더니 컵라면 뚜껑을 열었어요. 그리고 라면을 먹기 시작했어요. 한 입 후루룩 먹더니 걔가 말했어요.


“그냥 걱정돼서 와 봤어.”


헐.

걔 얼굴을 쳐다봤어요. 걔는 절 쳐다보지도 않고, 열심히 라면만 먹더라구요.


샘, 800원짜리 컵라면 무쟈게 작은 거 알죠? 걔 손바닥보다 더 작아요. 그거 진짜 한 세 젓가락 떠먹으면 끝. 걘 금방 라면을 다 먹고 자리에서 일어났어요. 그제야 나를 쳐다봤어요.


“힘내라.”


말하고선, 제 어깨를 주먹으로 툭 쳤어요. 그리고 후드를 뒤집어쓰더니 가버렸어요. 뒤도 안 돌아보고 달려갔어요. 그렇게 어둠속으로 사라졌어요.


아. 진짜 양아치 같아요. 어깨도 구부정하고, 걷는 것도 팔자걸음에 어기적어기적. 아무 데나 침 뱉고. 욕도 막 하고. 내 연락 다 씹고. 무뚝뚝하고. 아, 걔 진짜 싫거든요. 그런데요.


“나쁜 놈. 끝까지 돌아보지도 않네.”


걔가 앉아있던 자리를 쳐다보니까,

컵라면에서 아직도 김이 폴폴 나요.

샘, 그때 제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요?


보고 싶어 죽을 것 같다고.

정말로 죽을 거 같은 거예요. 컵라면을 좀더 큰 걸 먹든가, 아님 식을 때까지 천천히 먹든가. 아니, 다 필요 없고요. 그냥 옆에 조금만 더 오래 있어 주지. 너무 못됐어요.

있잖아요, 샘. 걔가 먼저 저 찾아온 거 처음이에요. 이런 말 건넨 것도요.


샘.

남자들은 원래 다 이런 거예요? 뭐가 이래요.

그런데 진짜 진짜 싫은 건요. 샘, 저 아직도 걔가 보고 싶어요. 보고 싶어 죽겠어요.

매거진의 이전글 마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