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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Nov 10. 2015

윤소정

유난스럽지 않은 소정, 그녀의 사정 혹은 핑계

좋다. 그리고 싫다.


두 감정을 시계추처럼 왕복하며 최극단의 표현을 애매모호하게 만들어버리기 일쑤인 변덕질. 늘 선택의 기로에서 확실한 선택을 미루고 주저하는 우유부단함. 애써 선택했다가도 없었던 일로 하면 안 될까 다시 갈팡질팡 흔들리는 팔랑귀. 소정은 내내 그렇게 살아왔다.


이십 대 후반, 작지만 안정적인 회사 회계팀에서 일하는 소정은 일곱 시 땡 칼퇴는 아니라도 비교적 쾌적한 환경에서 무난한 동료들과 일한지 어느덧 삼 년이 되었다. 종종 만나던 남자들은 여의도 증권맨이나 대기업 IT 부서에서 일했고, 소정은 그것이 자신의 사회적 위치 어느 즈음을 확인시켜 준다고 생각했다. 그 정도면 만족스러웠다.


소정은 유난스럽지 않은 여자였다. 다른 팀 여직원들처럼 반짝이는 것들을 좋아하거나, 빛나는 신분상승을 바라지도 않았다. 서른 살에는, 이대로 무난하고 조용한 삶이 평탄하게 이어져 평범한 샐러리맨을 만나 결혼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이런 소정의 입장에서, '좋다. 그리고 싫다.' 이건 단순히 호(好), 불호(不好)의 문제가 아니었다. 아주 어려운 문제였다. 자신으로부터 타인들로 이어지는 연쇄적인 관계의 문제였다.


소정은 ‘싫다’보다 ‘좋다’라는 선택이 어렵다.


싫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들은 대부분 보편적이다. 그것들은 지저분하거나 혐오스럽거나 유난스럽거나 이상하다. 일단 그런 것들을 ‘싫다’고 대답하면 무리 없는 보편적인 대화가 이어진다. 또한 굳이 자신을 드러낼 필요도 없다.


하지만 좋다. ‘좋아하는 것’들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내가 ‘좋다’고 대답하며 내 취향과 감정을 어필하는 순간, 그것을 좋아하지 않는 누군가는 적대적으로 돌아설 수도 있다. 그리고 소정을 평가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녀를 어떤 류의 여자로 정형화시키고는 분류할 것이다. 그럼, 누군가는 그런 유형의 소정을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고 ‘싫어할’ 것이며 그리하여 결국에는 연쇄적으로 모두가 나빠질 수도 있다.


그때부터 이건 단순한 호불호 문제가 아니라, 신중한 선택의 문제이다. 자칫하면 자신이 눈에 띄게 돋보일 수도 있는 두려운 문제이다.


앞서 말했듯이 이십 대 후반의 유난스럽지 않은 회사원인 소정은 주목받는 데에는 영 익숙지 않다. 남에게 폐를 끼치는 건 죽어도 싫다. 사람들은 그런 소정이 배려 깊다고 칭찬하지만, 사실 소정은 모든 것에 무관심하고 싶을 뿐이다. 괜히 새로운 관계에 엮이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소정은 그런 여자다. 복잡한 거리에서 이어폰과 팔짱을 단단히 끼고, 되도록 타인과 부딪치지 않게 조심조심 걷는 여자.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건 배려가 아닌 무관심이다.  


소정은 생각한다.

내 감정을 드러내는 것. 내가 ‘좋다’고 선택하여 나빠질 어떤 상황들을 내가 책임질 수 있을까? 그것은 곧, 책임의 문제. 책임지지 못할 경우에는 후회의 문제로 번질 텐데. 지금도 충분히 잘 정돈되어 있고, 모두가 해피 ing로 보이는 상황을 자신이 굳이 복잡하게 흩뜨려야 할까. 그런다고 내가 지금보다 행복하다고 느낄까.


흔히 소정과 같은 이런 상황은 드라마에서 자주 펼쳐진다. (퇴근 후, 드라마 시청은 소정의 낙이다.) 대개 드라마 속 여주인공들은 감정적이다. 수십 번씩 변하는 감정의 오로라를 발산하고, 덕분에 그 주위는 초토화. 고난과 역경을 딛고, 사랑과 행복한 삶을 거머쥔 여주인공. 웃으며 또르르 눈물 한 방울. 끝내주는 남자와의 달콤한 키스씬. 그 여자는 현실에서도 행복할까.


노노. 그야말로 나쁜 년이지.

소정은 자신이 이타적인 성향의 어른이며 누구보다 제 분수를 잘 아는 여자라고 자부한다.


그리고 위로한다.

보이지 않는 듯 살아도 좋아. 선택과 책임과 후회를 감당하기엔 소정은 너무나 바쁘다. 커리어를 쌓기 시작한 일 외에도 가족과 적금, 쇼핑과 미용 등등. 신경 쓸 일이 한둘이 아니다. 이 일상도 그리 나쁘진 않아. 죽자사자 기운 빼는 감정의 소비 대신, 그녀는 효율적이고 현명한 소비자가 되기로 한다.


좋다. 그리고 싫다.

굳이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아도 된다.


어쩌면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고 모두와 잘 지내는 게 내게는 최선의 삶이야. 그렇게 소정의 평온하고 안정적인 나날들이 지나간다.


유난스럽지 않은 소정,

이십 대 후반 그녀의 인생은 드라마가 아니므로 죽어도 여주인공 할 생각은 없다는 그녀의 사정 혹은 핑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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