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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Oct 25. 2015

일요일의 공기

 소울푸드와 함께한 따뜻한 일요일들

일요일엔 내가 김치볶음밥 요리사!



학창 시절, 일요일 아침은 언제나 김치볶음밥이었다. 내가! 김치볶음밥 요리사! 나는 신김치를 달달 볶으며 짜파게티 광고노래를 개사해서 부르곤 했다. 그럼 엄마랑 동생은 이불을 둘둘 말고 자고 있거나, 이불을 둘둘 말고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먼저 달궈진 프라이팬 위에 마아가린을 녹이고, 신김치와 참치를 달달 볶다가 찬밥을 넣고 고슬고슬 볶아주면 된다. 설탕 약간과 MSG 약간을 마법의 가루처럼 솔솔 뿌려 간을 하고, 돌김을 잘게 부수어 뿌려준다. 그리고 고 위에 반숙 계란 프라이 세 개를 꽃잎처럼 올려내면 김치볶음밥 완성!


출처 : www.youtube.com/watch?v=Lf44Fk7H24s


열어둔 창문으로 불어오는 상쾌한 바람. 방안에 기울어 쏟아지던 노오란 아침 햇빛. 그럼 가벼운 먼지들이 햇빛 속에 반짝이는 눈송이처럼 동동 떠다녔고, 나는 그걸 ‘일요일의 공기’라고 불렀다.


일요일의 공기를 데우는 것들 - 경쾌한 텔레비전 소리, 엄마와 동생과 나의 체온으로 딱 적당히 따뜻한 방안의 온기, 고소한 김치볶음밥 냄새. 일요일이었다. 내가 김치볶음밥을 볶던 일요일의 풍경이었다.


평화로웠다. 그리고 행복했다. 내 생애 가장 행복한 순간이 바로 그때였다.


엄마는 일요일 아침마다 내게 주방을 내어주었다. 그러면 나는 프라이팬 한가득 김치볶음밥을 만들었다. 김치볶음밥이 완성되면, 우리는 프라이팬 주위로 동그랗게 모여 앉아 숟가락을 부딪치며 김치볶음밥을 먹었다. 반은 신김치의 맛, 반은 MSG의 맛이었지만. 어쨌든 내가 만든 김치볶음밥은 꽤 맛있었다.


우린 금방 뚝딱 프라이팬을 비웠고, 부른 배를 땅땅 두드리며 다시 이불에 들어갔다. 그리고 엄마 옆에 쫄로리 붙어 누워 텔레비전을 봤다. 일요일이었다. 우리가 김치볶음밥을 먹던 일요일의 풍경이었다.    


우리 가족은 딱 6개월을 그렇게 함께 살았다. 엄마가 기꺼이 주방을 내어준 건, 주중 내내 힘들게 일했기 때문이었고, 먼지들이 반짝이는 눈송이처럼 떠다니던 방은 몹시 비좁았다. 냉장고엔 신김치와 계란이 전부였고, 우리가 함께인 일요일은 언제나 짧았다.


김치볶음밥은 내가 가족들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이었다. 배고픈 일요일 아침. 가족들보다 조금 일찍 일어나 김치볶음밥을 만드는 일. 거기에 나는, MSG와 돌김가루와 내 마음도 한 숟가락 골고루 뿌려주었다.



행복하자 우리



나는 아직도 그때의 김치볶음밥의 맛을 잊을 수가 없다.

행복은 일요일 아침처럼 짧기에 아름답게 반짝 빛났다.


6개월이 지나고 우리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다. 흩어진 우리는, 외롭고 보고 싶고 춥고 배고픈 각자의 일요일 아침을 맞이했다. 나는 주로 텅 빈 학교 기숙사에서 아침을 맞이했다.






그렇게 또 2년이 지나갔다. 나는 수능을 치르고 기숙사에서 나와야 했다. 마땅히 갈 곳이 없었기에 학교 앞 고시원에서 잠시 살았다. 나는 주로 고시원 친구들과 함께 밥을 사 먹거나, 혼자일 땐 빵으로 끼니를 때우곤 했다. 고시원 친구들도 일요일에는 각자 집에 다녀왔다. 집이 없었던 나는, 기숙사에 살았을 때처럼 고시원에서도 일요일 아침에는 덩그러니 혼자였다.    


그러던 어느 날, 일요일 아침이었다.

그날은 눈이 내리려는지 잔뜩 흐린 하늘이 낮게 깔렸고, 공기는 내 허리춤 정도에 가라앉아 잔잔한 강물처럼 머물러 있었다.


그날도 나는 고시원에 혼자 있었다. 수능은 다 끝났고 교과서는 이미 저쪽 구석에 치워둔 상태, 공부할 것도 없었다. 책도 음악도 다 귀찮았다. 텔레비전도 없는 방은 우주처럼 조용했다. 빌려둔 만화책이나 볼까 했지만 좀처럼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방 한가운데 그냥 멀뚱히 앉아있었다.


무념무상. 혼자라는 게 딱히 외롭거나 슬프다는 생각이 든 건 아니었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내가 꼭 죽은 나무토막 같아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몽롱한 꿈속에서 나 홀로 투명인간이 된 것만 같았다.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삐꾸, 나 문 좀 열어줘.    


리삐꾸였다. 서로가 리삐꾸, 고삐꾸라고 부르는 우리는 베프였다. 베프라 하더라도 일요일에 리삐꾸를 만나는 일은 없었다. 삐꾸는 가족 모두가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일요일이면 가족들과 종일 교회에 있었다. 그런데 그날, 교회에 있어야 할 삐꾸가 고시원 문 앞에 와 있었다. 털장갑을 낀 손에는 앙증맞은 보따리 하나를 들고.


영화 <하나와 앨리스> 스틸


삐꾸는 겨울 공기를 몰고 고시원 방에 들어왔다. 순식간에 찬 공기가 돌고 방안이 상쾌해졌다. 볼 빨간 삐꾸는 방바닥에 철퍼덕 앉더니, 보따리를 주섬주섬 풀었다. 핑크색 도시락이었다.


“삐꾸, 이게 뭐야?”

“너 김뽂 좋아하자네. 내가 만들어 왔어.”


도시락 두 칸이 전부 다 김치볶음밥으로 꽉꽉 채워져 있었다. 아. 나는 뭐라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상황이 어리둥절했고, 뚝뚝한 성격에 감동한 티를 내기에는 조금 부끄러웠다. 그냥 삐꾸가 내미는 숟가락을 들고 김치볶음밥을 한 숟가락 떠먹어봤다. 기대로 가득 찬 삐꾸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김치볶음밥 한 숟가락을 입 안에 넣자, 턱이 뻐근하더니 곧 입 안 가득 침이 고였다. 아삭한 김치가 씹히고, 포슬포슬한 참치가 간질이고, 기름진 밥알이 부드럽게 굴러다녔다. 그리고 가득 퍼지는 향긋한... 카레향. 카레향?


“야, 이게 뭐야?”

“왜왜? 뭐가 이상해?”


“이게 무슨 맛이야?”


삐꾸는 얼른 한 숟가락 떠먹었다. 녀석의 미간이 살짝 구겨지더니 서서히 코평수가 넓어졌다. 그리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니. 녀석은 입을 꾸욱 다문 채,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고 있었다. 마저 밥을 꿀떡 넘기고는 삐꾸가 입을 열었다.



어떡하지? 엄청 맛없어!



삐꾸는 깔깔대며 웃었다.


“김치볶음밥에서 왜 카레 맛이 나?”

“그야, 카레를 넣었으니까.”


“카레를 왜 넣어?”

“김뽂 레시피를 찾아보니까 카레를 넣으면 맛있다고 해서... 카레를 넣는다는 게 좀 많이 넣은 거 같지?”


좀 많이 라니. 아주 카레를 들이부었고만. 세상에, 내 생애 그렇게 맛없는 김치볶음밥은 처음 먹어봤다. 나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난감한데, 삐꾸는 아예 바닥에 드러누워 깔깔깔 웃고 있었다.  


“먹을 거로 장난치지 마, 임마.”

“장난이라니! 야, 나 엄청 진지해. 난생처음 요리해본 거야. 너 혼자 또 빵 사 먹으면 어떡해? 에이씨, 꼭두새벽부터 만들어왔는데 완전히 망해버렸네.”


삐꾸가 웃음을 뚝 그치고 쓸쓸하게 말했다. 하긴 뜀박질 좋아하고, 섬세한 예술코드라곤 솜털만큼도 없고, 여성스러움이랑은 아주아주 거리가 먼 삐꾸가 요리를 잘한다는 게 더 이상한 거다.


정말로 그렇게까지 맛이 없는 건가. 삐꾸는 꿍얼대며 몇 번이고 밥을 먹어보고 있었다. 그런 삐꾸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나는 그제야 코끝이 찡해졌다.


일요일 아침이면 조금 일찍 일어나 혼자 김치볶음밥을 만들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신김치를 달달 볶던 내 뒷모습은 어느새 삐꾸의 뒷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김치볶음밥에 MSG를 넣던 내 모습 위로 카레가루를 들이붓는 삐꾸의 모습이 겹쳐졌다.


에이씨, 얘는 또 일요일 아침부터 감동을 주고 그래. 나는 괜히 한번 코를 쿨쩍이고는 삐꾸가 만든 카레김치볶음밥을 먹었다.


“억지로 먹지 마.”

“아니야. 먹다 보니 또 먹을 만해. 카레김뽂이 원래 이런 맛인가 보네.”


“그런가? 하긴 카레김뽂은 나도 한 번도 안 먹어봤어. 원래 이런 맛인가 봐.”

“암튼 잘 먹겠습니다!”


삐꾸도 숟가락을 들었다. 도시락 두 칸에 꾹꾹 눌러 담은 카레김치볶음밥. 우리는 방바닥에 앉아서 숟가락을 부딪치며 김치볶음밥을 먹었다. 우리의 야무진 숟가락질에 김치볶음밥은 금세 사라졌다. 도시락은 텅텅 비었다.


우리는 부른 배를 땅땅 두드리며 대자로 누웠다. 방안에 카레향이 은은했다. 햇빛이 비쳐 드는 공기 중에 노오란 카레향이 동동 떠다니는 것만 같았다.


“배부르다.”

“응, 나도 배가 터질 거 같아.”


“야. 내가 너의 미래 남편을 위해 솔직히 말해줄게. 카레는 넣지 않는 게 좋겠어. 진짜 내가 먹어본 김뽂 중에서 제일 맛없었어.”

“사실 나도. 진짜 맛없었어. 아놔, 꾸역꾸역 먹느라 죽는 줄 알았네.”


우리는 어깨를 들썩이며 요란하게 웃었다.



삐꾸야, 이제 일요일의 공기는 이거야.




“그게 뭔데?”

“그런 게 있어.”


나는 말없이 빙그레 웃었다. 행복했다.  


우리는 그대로 곰처럼 누워, 빈 도시락을 치울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카레향은 오래도록 방안에 떠다녔다. 우리는 방바닥을 떼굴떼굴 굴러다니며 수다를 떨다가, 나란히 배를 깔고 엎드려 만화책을 봤다. 삐꾸와 나의 체온에 딱 적당히 데워진 방안의 온기. 일요일이었다.


우린 눈치채지 못했지만, 창밖에는 막 하나 둘 눈송이가 떨어지고 있었다.

그날은 많은 눈이 내렸다. 눈 내리는 날은 언제나처럼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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