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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수리 Oct 29. 2015

목요일의 조언

상사의 조언 "조직에 지나치게 충성하지 마"

일단은 이게 우리의 마지막 씬이야. 면접에서 너를 처음 봤을 때, 어떤 기시감, 데자뷰 같은 게 있었어. 이미 알고 있었고 당연히 만나야 할 사람 같았다. 넌 힘들게 살아왔지만, 긍정적인 에너지가 넘쳤어. 나는 그 점이 대단하고 생각했다. 나는 어떻게든 너를 좋은 길로 끌어주고 싶었어. 그래서 너를 선택했고, 그때부터 네게 인생의 멘토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갑자기 말이다. 네게 버티라고 붙잡고서는 되려 내가 나가버리는 이 상황을 나는 설명하기가 힘들다.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이란 게 있는 거야. 하지만 나는 네가 잘해낼 거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네게 몇 가지만 말해주고 싶다.



첫째, 조직에 지나치게 충성하지 마.


조직은 개인을 고려하지 않아. 한순간에 배반할 수도 있고, 한순간에 묻어버릴 수도 있어. 너는 조직에 속해 있되, 그 속에서도 너 스스로 능력을 키워. 너만의 스킬을 단련해야 해. 그러려면 최소한 3년은 버텨야 한다. 이 일이 네가 하고 싶은 일이라면, 앞도 옆도 뒤도 보지 말고 네 위치에 충실해라. 하지만 명심해. 너 스스로 능력을 키우는 데에는 절대로 게으르지 마. 그렇게 3년만. 그럼 뭔가가 보일 거야.




둘째, 겸손해라.


어느 정도 일이 익숙해지고 자신이 붙으면, 세상이 다 네 것 같고 보이는 게 없을 거야. 기고만장해지고 오만해진다. 너도 모르게 그런 순간이 다가와. 그때 고개를 뻣뻣하게 들지 마라. 스스로 고개를 숙이고 매 순간 겸손해야 해.




마지막으로, 너는 친절한 리더십을 가져라.


모든 사람이 편하게 다가와서 말을 걸고, 또 웃을 수 있는 그런 친절한 사람이 돼. 나는 그러지 못했다. 독기를 품고 내 사람들만 아꼈고 또 친절했지. 이기적이고 무서운 존재였다. 지금 내 평판은 '일 잘하는 사람'이 하나, 그리고 또 하나가 '싸움꾼'이다. 나는 자존심을 세우고 모든 관계에 경계를 긋고, 그 선을 넘어오는 일과 사람들과 싸웠다. 하지만 너는 그러지 마라. 넌 독을 풀고 친절한 사람이 되어라. 항상 웃고, 모든 사람들이 편하게 다가올 수 있는 그런 친절한 리더십을 키워. 넌 앞으로 더 클 거야. 난 그 가능성을 봤어. 친절한 수리 씨가 돼. 알겠지?



네, 앞으로 더 열심히 살겠습니다.


그만 열심히 해. 열심히 살지 않아도 돼. 너는 지금껏 열심히 살아왔어. 가끔 어린 나이에 네가 스스로 지고 있는 책임감과 부담을 본다. 이제는 네가 열심히 말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하기 싫은 일은 내일 해. 하기 싫은 일은 제일 마지막에 해. 지금은 너는 하고 싶은 일을 제일 먼저 해야 해. 하고 싶은 거, 즐기고 싶은 거 우선으로 해. 네 꿈이 작가랬지. 나도 한때 시인을 꿈꿨어. 그런 꿈들. 잊지 말고 간직하고 단련해. 마지막까지 내가 이끌어 주고 싶었는데. 미안하다.

일단은 이게 마지막 씬이야. 우리 인생에서 몇 번이나 더 이 씬이 반복될지 모르겠지만, 우린 다시 만날 거다. 잘 지내라. 그리고 웃으면서 살아라.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일을 해야 한단다.






스물다섯, 나의 첫 사회생활은 다사다난했다. 한때 70여 명의 직원이 활기차게 일했던 회사는 사실 오래전부터 기울고 있었다. 다시 일어설 희망이 없었다. 햇병아리 신입들만 남기고 실장, 부장, 본부장이 차례로 나갔다. 나는 그렇게 어쩔 수 없이 떠나는 나의 첫 번째 상사와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반 년 뒤, 나도 회사를 나와 방송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얼마 후, 내가 일하던 부서는 없어졌다. 그리고 또 얼마 후, 회사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시한부 인턴으로 들어가 정규직 전환을 위해, 무조건 웃으며 예스만 외치던 사회초년생 나. 그때 나는 미생이었다. 막상 정규직이 되자 내 직업에 회의감을 느끼며 갈팡질팡하던 1년 차, 그때도 나는 미생이었다. 그리고 회사를 나와 불안정한 프리랜서로 밥 벌어 먹는 지금도, 여전히 나는 미생이다.


하지만 다행히 나는 훌륭한 상사를 만났다. 나의 첫 번째 상사의 진솔한 조언은 내가 옳은 길을 선택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나는 조직에 지나치게 충성하지 않았고 내 위치에 충실한 동시에 내 능력이 무엇인지 계속해서 고민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순수하게 하고 싶은 꿈을 잊지 않았다.


내가 만일 무조건 웃으며 열심히 예스만 외쳤다면, 지금 나는 어떤 길을 걷고 있을까. 회사가 사라진 다음에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래서 나는 행복했을까. 그의 조언은 현명했다.


상사의 마지막 출근 날, 상사는 나를 회의실로 불러냈다. 그리고 오랫동안 마주 앉아 내게 진지한 조언을 건넸다. 그날 이후로 5년이 지났고 나는 여전히 미생이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지금 내가 하는 일이 아주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행복한 일을 하는 것, 그리고 행복하기 위해 일을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거였다.


행복하기 위해 일을 하라니. 이런 인간적인 상사가 또 어디 있을까 싶다.


그의 조언은 현명하고도 따뜻했다. 그는 나를 한낱 직원이 아닌 인간으로 대해줬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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