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릿느릿 조용히, 편견이 녹는 시간
홍대의 어느 디자인 소품샵에 들렀을 때의 일이다. 나는 친구와 예쁜 소품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우당탕 요란한 소리가 들리더니 2층에서 덩치 큰 남자가 계단을 내려왔다.
남색 추리닝 차림의 남자는 점퍼가 어깨에 반쯤 걸쳐져 벗겨진 채였다. 바짝 깎은 까까머리에 초점이 흔들리는 눈, 벌어진 입술 사이로 이상한 소리를 지르는 모습을 보아하니 남자는 지적장애를 앓고 있는 것 같았다.
남자가 걸어오는 자리마다 사람들이 흩어졌다. 서둘러 상점을 나가는 사람도 있었다. 점원들은 굳은 표정으로 남자를 주시하고 있었다. 조용해진 상점 안에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새여핀 새여핀”
남자는 어눌한 발음으로 소리치며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우리는 남자를 피해 물러섰다. 불쾌하다기보단 무서웠다. 나보다 덩치가 배로 큰 남자가 소리를 지르면서 다가오니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새여핀 새여핀. 그런데 가만히 남자의 말을 듣다 보니, 그가 찾고 있는 게 색연필이라는 걸 알았다. 마침 우리 앞에 있던 색연필 세트를 그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남자가 말했다.
“미이 새여핀 미이”
아, 미니 색연필. 나는 작고 동그란 통에 든 미니 색연필을 다시 집어 주었다. 그러자 남자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더는 소리치지 않았다. 꾸벅 인사까지 하고 돌아섰다.
커다란 남자가 제 손바닥보다 작은 미니 색연필을 들고 가는 뒷모습은 천진하기도 하고 측은하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미안했다. 단지 미니 색연필을 사려고 한 것뿐인데, 그를 무서운 사람으로 오해해서 미안했다.
종종 지하철이나 상점에서 지적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들을 마주친다. 이상하게도 대부분 비슷한 몸집과 표정을 가졌고, 속을 알 수 없는 행동을 하거나 소리를 지른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 사람에게 묘한 이질감을 느껴 움츠러들고 그 자리를 피하곤 했다.
나와는 어딘가 다른 사람을 만난다는 것 자체가, 내게는 낯설고 두려운 일이었다. 불쾌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다. 익숙지 못한 사람이나 환경을 만나면 누구든 두려움부터 불쑥 튀어나오기 마련이다.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몰라 잔뜩 예민해져 낯선 이를 경계하는 것이다. 고양이들이 낯선 것들을 마주하면 털부터 바짝 세우는 것처럼.
하지만 사람을 두고 그런 경계를 하는 건, 솔직히 무례하고 미안한 일이었다. 아마도 그런 게 편견이라는 거겠지. 나는 많이 미안했고 부끄러웠다.
미니 색연필을 들고 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조금만 미안해하기로 했다. 그리고 앞으로 그와 비슷한 사람을 만나면, 미안한 만큼만 더 마음을 열고 상대방을 지켜보기로 했다.
그 후로 얼마 뒤, 나는 백화점에서 그와 비슷한 사람을 만났다. 덩치 큰 남자애가 내 어깨를 세차게 부딪치고는 쿵쿵거리며 에스컬레이터를 내려갔다. 부딪친 건 나뿐만이 아니었던지 주변 사람들의 얼굴이 구겨져 있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웅성거리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한 아주머니가 나왔다. 야구모자를 눌러 쓴 아주머니는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남자애를 뒤따라 내려갔다. 죄송하단 인사가 습관이 된 탓인지, 따갑게 꽂히는 사람들의 시선이 내리누른 탓인지. 여전히 굽은 어깨로 아주머니는 에스컬레이터를 내려갔다. 그리고 남자애를 불렀다.
“주호야, 엄마랑 같이 가야지.”
그제야 남자애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손발을 가만히 두지 못했다. 눈빛이 쉴 새 없이 흔들렸다. 자신은 먼저 빨리 내려가고 싶어 죽겠는데, 그래도 엄마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아주머니는 조심스럽고 빠른 걸음으로 내려가 남자애의 팔을 붙잡았다.
남자애는 조용해졌다. 엄마는 남자애의 머리칼을 쓸어주었다. 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사람들도 에스컬레이터도 조용히 내려갔다.
느릿느릿 조용한 지금 이 순간.
어쩌면 사람들이 모자를 이해하고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남자애 이름이 주호였구나.
나는 주호 엄마의 굽은 어깨를 곧게 펴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배경사진은 영화 '검은 풍선'의 스틸컷입니다.
'주호'라는 이름은 가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