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아빠의 결혼기념일

함께 살지 않은 시간보다 함께 살아온 시간이 길다는 것

by 달기

결혼 전,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을 챙기는 편은 아니었다. 아빠도 아닌 왜 내가..? 사실 아빠조차도 가끔 챙기는 둥 마는 둥. 그런데 결혼을 하고 보니 결혼이라는 것에 대한 무게를 온몸으로 겪어서 그런지 괜히 가끔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무려 결혼이라는 걸 하고 이 시간을 살아내서 여전히 내 부모님으로 함께 한다는, 당연하지만 어쩌면 당연하지 않을 수 있는 무게를 조금 알아버렸다고나 할까.


뭉그적 거리다가 늦은 시간 동네 꽃집에 갔다. 출근길에 엄빠 집을 지나니 아침에 배달을 하기로 했다. (사실 지나가는 길이니 배달비를 아끼자는 심산이었다) 꽃이라고는 볼 줄도 모르고 적당히 예쁘게 해 주세요-가 전부인 인간이지만 어쩐지 꽃은 직접 가서 사게 된다. 부모님 결혼기념일이라며 꽃바구니를 보고 있으니까 사장님이 마감시간이라 남은 게 별로 없다며 지금 만들어드릴까요 하신다. 네-라고 하고 기다리며 꽃구경을 했다.


바구니를 받아 들고 나왔다. 가을 가을 분위기가 물씬 났다. 핸드폰으로 못 사는 것이 없는 세상이지만 동네 단골은 어쩐지 든든하다. 다음날 출근길에 엄빠 집에 들러 벨을 눌렀다. 엄마는 운동을 갔고(세상 부지런한 우리 엄마는 새벽 6시 수업을 듣는다. 직장을 다니는 나도 그 시간에는 잔다) 아빠가 당황한 표정으로 웬 꽃? 이냐고 한다. 결혼기념일 몰라? 했더니 전혀 몰랐다는 얼굴로 아빠가 부족했네-한다. 따지고 보면 꼭 남자가 챙겨야 하는 건 아니지만 아빠가 챙기고 엄마가 받는 모습이 나는 좋고 늘 그랬다. 덕분에 안 잊어버린 척할 수 있다며 고맙다는 아빠에게 안 되겠네-라며 총총 인사를 하고 출근을 했다.


일을 하다 보니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잊고 있었는데 꽃 받으니 좋네-란다. 어젯밤, 꽃바구니를 기다리며 사장님과 수다를 떨던 게 생각났다.


"아이들 키우고 젊을 때는 정신도 없고 먹지도 못하는 꽃을 왜 사주나 싶은데 여자들이 나이를 먹으면 남편이 꽃 사주는 걸 은근히 기대해요. 아직 나를 여자로 보고 사랑하는구나 싶어서. 사실 남자들이 꽃 사러 오는 거 다들 귀찮아하잖아요. 꽃가게도 와야 하고 골라야 하고. 그 시간에 그래도 나를 생각했구나 싶어서 받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요즘 세상에는 꽃바구니도 시키면 그만이지만 그래도, 어쩐지 내가 그런 것처럼 누군가를 위한 꽃은 직접 고르게 된다. 세월에 닳아서 잊혔던 것 같은 마음도 어디 한 켠에 숨겨져 있었을지 언정 사라지지 않는다. 이 나이에 뭘 이런 걸 챙기냐-면서도 막상 싫지 않은 엄마의 목소리. 한 때 열렬히 사랑했고 평생을 함께하기로 했던 두 남녀가 자식을 낳고 그 자식들이 제 가정을 찾아 떠난 후에도 여전히 함께 산다는 것은 어떠한 기분일까. 나 같은 초짜는 아직 넘보기 어려운 경지겠지. 평생을 통틀어 누군가와 함께 살지 않은 시간보다 함께 산 시간이 길다는 것은 그 자체로 참 대단한 일임을 이제는 알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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