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가난 속에서 버티는 법
고등학생이 되었을 무렵, 아버지는 와식 생활의 달인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의 직립보행을 목격할 수 있는 시간은 새벽 6시쯤이었다. 닭과 오리에게 모이를 주고, 개들에게 사료와 물을 준 다음 그는 다시 누웠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의 경제활동을 위한 엄마의 지원이 계속될수록… 그는 이불 속으로 더욱 파고들었다.
그는 시대를 잘못 타고난, 재주 많은 n잡러였을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치기공학을 전공했다. 그에겐 출근이 가능한 치기공 사무실이 있었다. 또한 그는 목공에 능해서 3단 장식장 따위를 만들 수 있었다. 한식과 양식 조리 기능사 자격증이 있었다. 버스는 물론 탱크로리 운전도 가능했다.
사내대장부로 태어난 이상 칼로 무라도 썰어야 한다! 보이스 비 엠비셔스… 가 당연시됐던 시대에 아버지는 오로지 밤에만 사내다움을 뽐냈던 것일까.
할 수 있는 일은 많았으나, 주변 사람들의 바람만큼 끝까지 해내지 못했다.
가장의 무게가 워낙 무거웠던 것일까. 혹은 간절하게 하고 싶은 일이 없었던 것일까.
그는 오랜 시간 침대 속에 머물렀다.
엄마의 가계부에 눈물자국이 도장처럼 찍히는 날이 많아질 무렵, 우린 종종 산에 올랐다. 주말 새벽이면 검정 봉지를 들고 나섰다. 엄마는 내게 운동을 해야 한다고 했다. 산에 올라가 노래를 부르며 목소리를 틔워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은 도시 사람이라 그런 지 고사리를 따는 게 신나고 재미진다 했다.
재미로 딴다고 하기엔 고사리 수확은 생각보다 고되었다.
우선 경쟁이 치열했다. 집 뒷산의 고사리는 동네 할머니들도 좋아하는 나물이었나보다.
조금이라도 늦잠을 자다간 고사리는 이미 꺾이고 없었다.
하지만 풍성한 수확이 허락될 때도 있었다. 축축한 흙 위에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 눈으로 훑다 보면, 동그랗게 말린 연둣빛 고사리가 보였다. 이슬을 머금은 채 고개를 숙인 어린 순… 고작 10cm쯤 되었을까. 햇빛이 본격적으로 들이닥치기 전, 툭툭 꺾다보면 검정 봉다리에 연한 고사리로 가득했다.
운동하는 김에 고사리나 캐자던 엄마와 나는 침묵 속에서 오랜 시간 땅을 더듬었다.
고사리를 잔뜩 따오는 날에 엄마는 왠지 더 들떠보였다. 물이 한 가득 담긴 냄비에 고사리를 삶은 후 널어놓은 고사리는 이쑤시개 너비만큼 가늘어졌다. 엄마는 바싹 마른 고사리 덩어리를 빨간 양파 망에 넣어 빨랫줄에 걸어놓거나 채반에 쌓아놓았다.
갈색 고사리를 불려 들깨가루를 잔뜩 넣고 볶으면 여러 반찬이 필요 없었다.
고사리, 냉이, 쑥, 두릅, 민들레, 씀바귀… 땅에서 나는 모든 것들을 뜯어먹을 때에, 엄마가 새롭게 눈을 돌린 것은 버섯이었다.
엄마는 우리를 만나기 전 8년 정도 일본에서 살았다고 했다. 엄마의 다이어리 한 면은 일본어가 빼곡했다. 엄마는 주말마다 얕은 냄비에 전골을 끓여냈는데, 나는 그게 일본식 전골인 스키야끼라는 걸 뒤늦게야 알았다.
엄마는 쑥갓, 이름 모를 버섯, 계란 등을 넣고 간장 양념에 끓였다.
어느 날 아빠는 고개를 저으며 수저를 내려놨다.
“이거 먹고 죽으면 어떡하냐. 나는 못먹겠다”
아버지는 질린다는 표정이었다. 정체모를 버섯에 생명의 위기감을 느낀 것이었다.
나는 그 순간 마음 속에서 작은 분노가 일었다.
‘누구 때문에 버섯 따 먹는 건데….’
아버지가 침대로 파고들 때, 엄마는 살기 위해 뭐라도 뜯고 있었던 것을 몰랐던 것일까. 어쩌면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상관없다는 마음이었을까.
혹은 어떡해든 밥상을 차려내고야 말겠다는 엄마의 의지에 마음이 흔들렸던 것일까.
너를 책임지겠다는 마음에 응답이라도 하듯 나는 엄마의 스키야끼를 꾸역꾸역 먹었다.
자식과 남편에게는 굳이 나누지 않는 그 시절의 가난은,
내 인생에 오래된 훈장처럼 남아 있다.
가난 앞에서 서로 다른 선택을 한 두 어른에게서,
나는 약하지만 강하고, 강하지만 약한 인간의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나는 엄마를 동정했고 아빠를 미워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