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빡이는 램프 아래에서 삼겹살, 와인, 춤
요란스럽게 등장한 그녀는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적하며 손봤다.
엄마와 살게 된 이후 우리는 접시에 반찬을 덜어 먹기 시작했다.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었다 놓는 것을 두어 번 반복하면 혼이 났다.
“휘적거리지 말고 단번에 집어”
밥을 먹으며 말을 하거나 쩝쩝거리면 혼이 났다.
“교양 없어 보여. 입을 다물고 차분히 씹어”
그러던 어느 날 상추를 잔뜩 뜯어온 오후였다.
“너는 구제불능이야!!!”
민트색 대야에 가득 담겨 있던 상추를 온통 짓이기며 씻었던 날, 엄마는 내게 구제불능이라며 소릴 질렀다. 그랬다. 나는 상추를 처음 씻어 보았던 것이다. 손으로 상추를 구겨가며 강력한 수압으로
2차 세안이라도 하듯 씻었으니…
엄마 입장에서 나는 최소한의 상식선을 아무렇지 않게 뛰어넘는 엉뚱한 녀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우리에게 행복을 근근히 이어가게 해줬다.
엄마는 톰 존스라는 오랜 팝가수를 좋아했다. 팝가수는 아니었던 것 같고, 올드팝 가수라고 해야 하나.
그녀는 늘 라디오를 틀었고,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면 흥얼거리거나 내게 춤을 춰보라고 권했다.
엄마에겐 춤 또한 삶에서 반드시 익혀야 할 필수 과목이었다.
그 날도 우리는 음악을 틀고 삼겹살을 구웠다. 아빠는 낯선 엄마를 만나, 태어나서 처음으로 와인을 마셔보는 것 같았다. 1.5리터 페트병에 담긴 소주를 벌컥벌컥 들이키던 아빠는 엄마로 인해 느리게 마시는 연습을 하는 것 같았다.
밥상 위에는 주변 산과 밭에서 수확한 녹색 채소들, 버섯들이 있었고… 주인공 삼겹살이 있었다.
엄마는 가난을 낭만으로 덮어내는 사람이었다.
만날 사람이라곤 농부뿐인 이 동네에서조차 늘 아이라인을 짙게 칠했고,
한 때 돈 천 만원 주고 샀다는 베르사체 밍크코트를 입고 다녔다.
품위와 낭만을 지나치게 중시했던 걸까. 엄마는 가난을 힘껏 밀어내기 위한 노력은 하지 않았다. 우리와 사는 내내 땀 흘리는 노동 환경에 자신을 두지 않았다.
다만 나름의 방식으로 가난과 공존해왔다. 적당히 불편한 모양새로-
엄마는 새벽녘 뒷산에 올라 고사리와 두릅과 버섯을 땄다. 주말에는 나 또한 검정 비닐을 두어 개 주머니에 쑤셔 놓고 산에 올랐다.
새까만 오폐수가 흐르는 도랑 옆에서 자라는 미나리를 땄다. 미나리는 주로 내가 땄다.
작은 텃밭을 빌려 빼곡하게 작물을 심었다. 아침마다 풀을 뽑고 고추를 따는 일에 나도 동원됐다.
시장에서 오리와 닭을 사다가 매일 오리 알과 계란을 먹었다. 알을 가져오는 일도 내 몫이었다.
삼겹살을 굽는 저녁식사가 한창일 때 낮은 천장에 위태롭게 달려있던 형광등이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마침 라디오에서 템포가 빠른 노래가 나왔는데, 노래의 리듬과 형광등의 깜빡거림이 묘하게 어울렸다.
우리는 두 개의 박자에 맞춰 신나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날은 웬일로 아빠와 동생도 막춤을 추고 있었다.
수명을 다한 전구, 삼겹살, 와인 그리고 올드팝…
우리는 정신을 반쯤 잃은 사람마냥 헤헤거리며 춤을 췄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심심함을 몽상과 춤으로 풀었기에 춤이라면 언제 어디서든 출 수 있었다.
하지만 아빠 앞에서 춤을 춰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뭐랄까. 나는 그 때 엄마 마음에 흡족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애쓰는 엄마를 응원하고 싶었나보다.
아빠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을 거라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그는 모처럼 평안한 가정을 꾸리고 싶었던 것일까. 차분했고 과묵했고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우리의 춤은 단 한번뿐이었다.
수명을 다한 형광등은 결국 언제 빛을 비췄냐는 둥 어둠 속에 잠기기 마련이다.
우리의 행복은 어둠 속으로 다시 잠기고 있었다. 아빠와 나와 동생에겐 익숙한 어둠이었다.
전구 아래에서 춤추던 우리를 또렷이 기억한다. 엄마는 그 때 행복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