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꿈꾸고 소망하던 프러포즈가 있었다.
시간과 장소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랑 결혼해 줄래?”라는 한마디 말과 주머니에서 꺼낸 반지 상자. 알이 있건 없건 내 손에 꼭 맞는 반지면 되었다. 이벤트를 위해 거창하게 준비된 프러포즈는 싫었다. 상황이 안된다면 반지는 생략하더라도 담담하되 진실된 한 마디면 되었다. 장소가 어디건 그 또한 중요하지 않았다. 버스를 타고 가다가, 카페에서 차를 마시다가, 공원을 거닐다가 그게 어디건 정말 이 여자랑 결혼하고 싶다고 간절히 느낀 순간에 청혼받길 원했다.
내 기억 속의 그날이 풍선과 촛불로 가득 차기보다는 그 사람의 눈빛 혹은 말투, 아니면 평소와는 달랐던 그날의 공기. 이런 이미지들로 기억될 수 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제일 중요한 나의 로망은 선 프러포즈, 후 결혼 준비였다. 이미 결혼이 진행 중인데 결혼 허락을 구한다는 건 앞, 뒤가 맞지 않는 일이라 생각이 되었다. 단어 그 자체의 의미를 잃어버리는 느낌이랄까.
그런데 이미 나도 프러포즈 없이 결혼을 준비하게 되었다. 그가 정식으로 결혼을 청하기도 전에 이 만남의 끝이 결혼인지 결별인지 선택을 강요한 사람이 나였으니 말이다. 의미 없는 프러포즈는 받고 싶지 않았지만, 결혼도 내 입에서 먼저 나온 마당에 그마저도 안 해주면 서운할 것 같았다.
혹시 어느 날 그가 프러포즈를 준비한 듯한 낌새를 눈치챈다면 가장 예쁜 모습으로 나가야지 생각하고 있었다. 화장도, 머리도, 옷도 최고로 예쁜 모습으로 프러포즈를 받고 싶었다.
신혼집에 가구와 가전은 다 들어갔고 옷가지와 화장품, 그리고 책들만 옮기면 따로 이사를 할 필요가 없어 주말마다 소소하게 짐을 옮기고 있었다.
“어차피 옷 정리만 하고 바로 올 거니까 화장하지 말고 간단히 씻고 바로 내려와. 짐은 내가 차에 싣고 있을게.”
그날따라 준비할 시간도 주지 않고 대충 준비하고 나오라고 재촉했다. 그가 3층과 1층을 오가며 차에 내 짐을 싣는 동안 정말 양치와 세수만 할 수밖에 없었다. 평소에 민낯이면 동네 슈퍼도 안 가고, 놀이동산에 갈 때조차 힐을 신고 가던 나였는데 어쩔 수 없이 맨얼굴에 머리는 고무줄로 질끈 묶고 평소에 잘 입지도 않는 청바지에 헐렁한 니트를 입고 출발했다.
금방 끝날 것 같던 옷 정리는 생각보다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었다. 옷가지가 많아서 하나하나 옷걸이에 걸어서 정리하는 데만 한 시간 넘게 걸릴 것 같았다.
“내가 뭐 도와줄 거 없어?”
“괜찮아. 이건 내가 해야 돼. 거실에 가서 쉬고 있어.”
열심히 옷 정리에 매진하고 있는데 내가 일은 잘하고 있는지 한 번씩 옷 방에 와서 살펴보고 갔다. 왜 자꾸 나를 감시하나 싶었다.
“정리 잘 돼 가고 있어?”
“응 걱정하지 마, 시간이 좀 걸릴 거 같긴 한데 잘 되고 있어.”
근데 갑자기 그가 나를 번쩍 안아 들더니(그때는 가능한 사이즈였습니다..) 거실로 나갔다.
높이 들려져 어지러웠고, 빨리 끝내고 싶은데 왜 방해를 하나 싶었다.
“놔줘!!! 나 빨리 옷 정리 해야 돼!”
뭐든 한번 시작하면 마무리까지 완벽히 해야 하는 성격이라 일하는 중에 갑자기 와서 들고 가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거실은 어두운 와중에 스탠드 조명과 촛불로 은은하게 빛을 밝히고 있었고, 스피커를 통해 재즈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는 장미 100송이로 만든 하트가 들어있는 상자와 반지 상자가 놓여 있었다.
결혼반지 대신에 간단히 커플링만 맞추기로 했는데 아무래도 영 마음이 쓰였던지 혼자 가서 반지를 맞춰왔단다. 내 인생에 다이아 반지라니. 그의 취향대로라면 아주 심플한 반지를 사 왔을 텐데 내 취향을 고려해서 화사한 반지를 사 왔다. 반지만큼은 마음에 쏙 들었다.
그러나, 내 손은 웬만한 남자 손보다 훨씬 더 크다. 손가락이 매우 길고 가늘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엄청 굵다.
“남자 손만큼 크고, 여자치고는 손가락이 많이 굵다고 말했는데 아무리 굵은 여자라도 이 정도 사이즈면 틀림없이 맞을 거라고 하더라고.”
그랬다. 그 반지는 내 새끼손가락에 아주 꼭 맞았다!!
“이 장미는 뭐야? 나 장미 별로 안 좋아하는데”
“이거 주문 제작해 놓고 퇴근하자마자 강남까지 가서 픽업해 오느라고 얼마나 공들인 장미인데.”
내 로망 속의 프러포즈와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었지만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했다.
장미 박스 안에는 손글씨로 적힌 카드가 들어 있었다.
- 나랑 결혼해 줄래? -
그러나 아무리 봐도 그의 글씨는 아니었다.
“이거 자기가 쓴 거 맞아?”
“아…, 나 글씨를 너무 못 써서 꽃가게 사장님께 부탁했어”
“ … … …. 나 꽃가게 아저씨랑 결혼해?”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딱히 꽃가게 아저씨 글씨도 별로였다. 생판 모르는 여자한테 결혼해 달라고 카드를 써야 했던 아저씨도 참 황당했을 듯.
어쨌든 그는 밀린 숙제를 끝낸 듯한 후련함을 느낀 하루였을 것이다. 프러포즈 압박으로부터 해방된 날.
어쨌든, 프러포즈, 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