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여가' 일수도 있습니다. <오티움>/ 문요한
생각만 해도 설레고, 일상에 활력을 주는 활동이 있습니까?
그 활동은 먹고사니즘과 무관하며, 나를 발전시키고 나를 둘러싼 관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줍니까?
자신 있게 YES!!라고 외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은 읽지 않아도 무방하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순수히 즐거움을 위해 어떤 활동을 시작하게 되는 일이 드물다. 우리는 오랜 세월 ‘여가’를 등한시한 채 살았다. 당장 나만 보아도 “책 ‘씩이나’ 읽다니 시간이 많은가 봐?”라는 말을 1년에 최소한 한 번 이상 듣는다. (물론 여기에는 합목적적 독서를 지향하는 분들의 안타까운 마음도 들어있음을 안다.) 여가라 함은 은퇴 후에나 즐길 수 있는 소일거리, 시간도 많고 돈도 많은 신선의 경지에서나 맛볼 수 있는 향락, 한겨울에 얼어 죽은 베짱이가 추구하던 딴따라짓쯤으로 여겨오지 않았는지 자문해 보자. 여기에 저자는 이렇게 질문한다. “일주일에 5일은 개미로 살되, 이틀만은 베짱이가 되면 안 되는가?”
팍팍한 건빵을 먹고 나면 마지막에 달달한 별사탕을 먹을 수 있다는 확실한 보장이 있다면 우리는 좀 더 참고 견딜 수 있다. 실제 많은 사람은 '고진감래'라는 한자성어처럼 지금을 참고 견디면 결국 좋은 날이 올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살아간다. (중략) 그러나 인생은 그렇게 친절하지 않다. 건빵을 계쏙 먹어도 끝까지 별사탕이 나오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고, 나중에 먹으려고 별사탕을 아껴두었는데 곰팡이가 피어서 버려야 할 수도 있다. 아니 행복이란 별사탕보다 유통기한이 짧은 과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일과 여가는 대립항이 아니다. 일상에 충실하면서도 즐거움을 찾을 수 있고, 오히려 그렇게 찾은 즐거움이 다시 일상에 활력을 가져다주는 선순환을 일으키는 것. 저자가 말하는 ‘오티움’은 단순히 쾌락을 좇는 것이 아닌, ‘내적 기쁨을 주는 능동적 여가활동’을 의미한다.
성인이 되면 힘들 때마다 누군가에게 위로를 받을 수 없다. 스스로 위로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단지 좋은 생각, 좋은 말을 해주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은 부차적이다. 자기 위로의 핵심은 '스스로 만들어내는 기쁨'이다. 그 기쁨은 내면 깊숙이 침투하는 고통을 막아낸다. 기쁨은 내면의 보호막이 되어준다. 그 활동이 바로 오티움이다.
"나에게는 오티움이 있다"고 말하고 싶은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지만, 오티움이 되기 위한 조건이 꽤나 까다로우니 잘 들여다보아야 한다. 오티움의 첫째 조건은 '자기 목적성'이다. 그 자체가 목적이어서 시작한 활동이라는 뜻이다. 오티움을 함으로써 외부적인 대가를 기대한다면 그 활동은 오티움이 되기 어렵다. 이를테면, 투자에 도움을 받을 요량으로 관련 서적을 읽는 행위는 오티움으로서의 독서라고 말하기 어렵다. (-라고 책에 적혀있으니, 저의 작위적 해석은 아님을 밝힙니다. 그다음은 '일상성'이다. 일상 속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이 오티움이므로, 해외여행과 같은 연례행사는 오티움이 되기 어렵다. 오티움이라면 모름지기 '주도적'인 것이어야 한다. 또, '깊이'가 있다. 책을 읽더라도 그냥 읽는 것이 아니라 한 분야를 깊이 알고, 인접 분야로 확장해 가며 읽는 것이다. 드라마를 하나 보더라도 배경과 서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고 음미하면 오티움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배움의 기쁨'은 오티움의 지속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그렇기에 책에서도 오티움에는 배움과 새로운 실험을 통한 ‘성장 경험’이 필수라고 이야기했다. 마지막 조건은 '긍정적 연쇄효과'다. 오티움과 단순한 쾌락의 결정적인 차이이기도 하다. 게임 중독, 알코올 중독, 쇼핑 중독 등과 같이 중독이라 이름 붙은 스트레스 해소거리는 일상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 이런 행위는 오티움이라 부르지 않는다. 여가를 통해 관계가 확장, 심화되고 일상에도 활력을 주는 활동이 오티움이다.
오티움은 운명적으로 만날 수도 있고 적극적으로 찾아 나설 수도 있다. 나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가장 가까운 가족에서 나의 취향을 그러모아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 앞선 선행과제는 ‘자기 이해’다. 현대사회만큼 ‘나’를 중시하는 사회가 있었을까 싶게 '나 찾기', '나로 살기', '나를 잃지 않는 법' 등이 연일 화제다. 긍정적인 신호라고 생각하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나에 대해 알아갈 기회를 갖지 못하였었다는 반증이라 여겨지기도 한다. 우선 나를 잘 들여다보자. 외향성 찬양의 사회에서 자꾸 외부 관계에 흔들리는 나를 붙들고, 타인과의 관계 지도가 아닌, '자기 지도'를 그려볼 것을 제안한다.
오티움을 만났다고 해서 거저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오티움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노오력'을 해야 한다. 이름하여 ‘점진적 과부하’이다. 동어반복이나, 어제의 나보다 오늘 내가 더 깊이 있어지기 위한 '향상심'을 갖는 것이다. 마침 책에 나의 오티움 "독서"가 예로 나온다.
자신이 읽고 싶은 책이나 읽기 쉬운 책만 본다고 해서 공부의 깊이가 늘지 않는다. 자신이 관심 있는 분야의 전문 서적이나 원서와 함께 인접 분야의 책도 볼 필요가 있다. 어려움이 사라지면 기쁨도 사라진다. 오티움이 과거의 행복이 아니라 오늘의 행복이 되려면 깊어져야 한다. 실력이 늘어야 한다. 실력 향상이란 자신의 능력을 조금씩 웃도는 자극과 도전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사실 오티움뿐만 아니라 지속하기 어려운 활동의 지속성을 높이는 좋은 방법 중 하나는 ‘함께 하기’이다. 오티움의 다섯 번째 조건인 ‘긍정적 연쇄효과’와 연관되는 개념이기도 하다. 상하관계, 내향 외향의 구분도 필요치 않은 ‘문화부족’에서 함께 오티움을 즐기는 공동체야말로 전통적 공동체가 무너진다는 이 시기에 꽤나 확실한 대안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창조적으로 살아가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에게는 의미 없는 군중 mass이 아니라 공통의 관심사와 창조적 젖줄이 되어줄 수 있는 '문화부족 cultural tribe'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군중은 구성원을 탈 개성화시키고 집단 사고로 몰아가지만, 문화부족은 구성원이 자기답게 살도록 고양시켜 주고 집단지성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창조적 인간으로 살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군중을 떠나 당신의 고유함을 드러낼 수 있는 문화부족을 찾아가야 한다. 집단 창조성의 보고! 오티움 공동체야 말로 우리를 더욱더 창조적 존재로 살아가도록 길러내는 토양이 된다.
오티움, 여가, 취미, 좋아하는 일- 이 연장선상에는 필시 ‘돈 버는 일’이 있다. 오티움은 돈을 벌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해서는 안된다는 조항이 있기 때문에 오티움을 통해 돈벌이가 이루어지는 것이 필수는 아니기에 마지막에 살짝 쓰셨다. 죄송하지만 이 부분은 이미 익히 알려진 내용인 데다, 책의 전체적인 목적과도 어긋나므로 이 부분만 궁금하셨다면 ‘좋아하는 일로 돈 버는 법’을 직접적이고도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책이 더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생산성이 거의 전부인 시대에 내 영혼을 돌보는 일에 시간을 쓴다고 하니 죄책감이 드시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내적 즐거움이 생산성의 동력이 된다는 연구 결과가 수두룩 빽빽하다는 점도 알아두셨으면 한다. 나의 오티움은 "독서"다. 삼십 년이 훌쩍 넘은 책벌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고, 나보다 더 잘 읽는다는 이와 경쟁할 필요도 없으며, 그 자체로 목적이되 그로부터 다른 것을 얻을 생각도 없는 온전한 오티움이다. 좋아하는 문장을 만난 날이면 하루 종일 곱씹으며 신이 난다. 빗길의 흙냄새, 누군가 문득 던진 한 단어에서도 읽었던 문장을 건져 올려 자연스레 그날, 그 순간을 회고할 수도 있다. 이만큼 즐거움을 주는 활동이 또 있을까 싶게. 그러니 시간낭비라는 걱정은 접어두고 일상의 '능동적' 즐거움을 찾아보면 좋겠다.
"당신의 오티움은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