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R이라고 들어는 봤나..
돌이켜보면 이렇게까지 대책 없이 애들을 데리고 올 수 있나 싶다. 나는 (실명을 대자보로 써붙이고 싶은) 유학원의 조언에 따라 해외 약사가 캐나다에서 약사로 일하고 싶을 때 등록하는 의무 과정을 통해 유학 비자를 받았다. 캐나다 정부는 은혜롭게도 정부가 인정한 교육기관에서 일정기간 학위를 이수하면 취업비자를 주는데, 약사면허 전환에 취업비자가 반드시 필요한 희한한 구조라 내게는 그것이 매우 절실했다. 한국에서 막연히 볼 때는 몰랐으나 이역만리에서 적응하며 곰곰 생각하니 저 가교과정은 '졸업 후 취업 비자'에 부적합할 것 같은 촉이 강하게 발동했다.
딱히 이유는 모르겠음에도 매일매일이 불안했다. 이렇게 불안하기보다는 돌다리도 두드리며 돌아가자 싶었다. 1년짜리 코스를 추가로 들어 안전을 도모하기로 한 것이다. 당시 내 유학비자 만료일은 6월의 어느 날이었고 대부분의 학기가 봄 또는 가을에 시작하니 그보다 어중간할 수 없다. 한참 뒤적이다 발견한 입학 가능한 학과는 Human Resources Management. 회사 다닐 때 적당히 거리를 두고 친하면 일신이 평안하다는 그 인사다. "그래, 인사는 만사지! 약국에서도 인간 다루는 것이 가장 어렵다지?" 이런 어이없는 생각으로 냅다 결정해 버렸다.
유학경험이 전무한 채로 그저 하루살이처럼 다국적 회사에서 일해왔다. 영어로, 그것도 난생처음 보는 과목을 공부하는 것은 생경하고도 험난한 경험이었다. 그럼에도 재미있었다면 좀 이상하게 들릴까? 회계 같은 과목은 한 번쯤 배웠으면 싶었는데 기회가 좋았고, 노동법이나 노사관계야 어디서 일하든지 알아두면 손해는 없을 것이었다. 솔직히는 공부는 습관이라는 말을 재확인하는 계기이기도 했다. 늘 스스로를 인풋형 인간인 건가 의심해 온 터라 장학금을 받아도 그리 기쁘지만은 않았다는 고백은 덤.
공부하는 재미와는 별개로 단순히 선택해 버린 학과의 최대 문제는 300시간의 의무 인턴쉽이었다. HR에 경력도 전혀 없고, 아무 배경지식도 없으며, 영어로 인사를 관리(하는 것을 보조) 해야 하는 자리에 어떻게 취직을 해야 하나 눈앞이 캄캄해졌다. 주변 사람들한테 내가 HR을 배운다고 말하면 다들 고개를 갸웃하며 "Healthcare야?"라고 묻기 일쑤였으니 이력서를 낸다 한들 어디서 제대로 봐줄까 싶었다. 어느 날 조별과제를 하면서 알음알음 알게 된 다국적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인턴 이야기를 하다가 우연찮게 북미에서 가장 큰 규모의 소아 전문 병원이 있고 다양한 범주의 자원봉사자를 채용하는데, 그중 HR 인턴자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병원! 그거라면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결론으로 질러가자면 나의 직감은 통하였다. SickKids Hospital이라는 공공병원의 채용팀 인턴으로 합격했다. 오예! 아기 같은 나의 매니저는 너무나 선한 사람이라 지원한 모든 학생들에게 인터뷰 기회를 주었다고 했다. Pronounce라는 말도 못 알아들은 나였음에도 (*성별에 따른 호칭. 여성성을 드러내는 She/her 또는 중성적인 호칭인 They/them으로 선택할 수 있음.) 인터뷰에 합격하여 좋으면서 의아했던 기억이 난다. 뭘 믿고 나를 뽑았을까. 후에 그녀는 내가 인터뷰 질문에 빠짐없이 답하면서 이전 직장에서 얻은 소프트 스킬을 능란하게 보여주어 아주 좋은 점수를 주었다고 귀띔했다. 외노자로 근무할 나에게 큰 힘이 되어준 말이었다. 3차 병원에 취직한 덕분에 캐나다 보건 시스템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졌다. 게다가 우연이자 운명인듯, 같이 근무한 인턴 친구가 10년을 캐나다 약국에서 어시스턴트로 근무한 경력자였다. 이 친구가 나에게 자기 매니저로 있는 분들을 소개해주어 든든한 뒷배가 생기기까지 했다.
나중에야 사실로 드러난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새로운 학교를 다니지 않았다면 취업비자도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비자를 해결하였을 뿐 아니라 필리핀, 인도, 루마니아, 스웨덴, 중국 등 각지에서 모여 자기 자리를 만들어나가느라 분투하는 멋진 친구들도 만났다. 2000년생 밀레니엄 베이비부터 나보다도 나이가 많은 친구까지 국적, 성별, 나이가 뒤섞인, 한국에 머물렀다면 만날 수 없는 이들이다. 사람 일이란 알 수가 없다. 돈과 시간이 모두 아깝다고, 이 나이에 무급 인턴이 웬 말이냐며 입이 댓 발 나왔던 적도 있었지만, 그 시간이 만들어준 인연과 경험들이 그간의 수고를 갚고도 남았다.
이국땅에서는 작은 기복도 엄청난 흔들림으로 다가온다. 그 과정에서 만나는 다른 경험들에 가중치를 두고, '안티프래질'해지는 나 스스로를 믿으며, 이왕이면 신나게 겪어내는 수밖에.
세상은 우리에게 자신을 알려주지 않는다. 이때 트라이애드는 우리가 이런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알려준다. 세상이 갖는 매력은 우리가 세상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안티프래질/나심 탈레브>
(물론 여전히 유학원 노옴들에 대해선 분노한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것들이 돈 받고 상담하는 업계 관례에 화가 나기도. 최종적으로 선택한 것은 나이기에 남 탓만 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