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국 <은전 한 닢>
남들은 퇴사를 할 때 두 번 다시 월급 개미가 되지 않으려고 한다는데 나는 퇴사를 하면서부터 다시 급여 생활자가 되기를 꿈꾸었다. 남의 땅에서 급여노동자가 되는 것에는 복잡한 의미가 있다. 나의 머무름이 정당하다는 지표이자 이 땅에 오래 살게 두어도 좋을 성실 납세자의 표식이랄까. 게다가 나에게는 지난한 시험과 취업비자의 골짜기를 비로소 다 지나왔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오랫동안 바라왔던 이 꿈은 기대하지도 않았던 순간에 다소 엉성히 이루어졌다.
실습 평가를 앞두고 내 평가자를 만났을 때, 약국 업무 흐름이나 방식에 익숙해질 수 있도록 사전 연습 시간을 길게 가질 수 있는지 물었다. 그녀는 이미 규칙에 정해진 오리엔테이션 위크에 연습을 '더' 하겠다고 나선 것을 굳이 막지 않았다. -라고 생각했지만 아마 이 요청으로 인해 내가 꽤 성실한 인간이라고 판단했던 듯하다. 인턴 생활이 으레 그렇듯 내뺌과 나댐 사이 어느 적당한 지점을 찾느라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게다가 내 평가자는 감정기복이 심했다. 기분이 좋을 때는 "I like your attitude"라며 한껏 치켜세우다 무슨 일이든 생기면 "Don't look for your mama!"라며 윽박질렀다. (자기를 엄마처럼 찾아대지 말라는 뜻이다.- 진짜 내 맘대로 해도 되는 것도 아니면서. 흥.) 전혀 다른 환경에서 일했어도 십여 년 사회생활로 다져온 짬이 어디 도망가진 않는 법. '너는 짖어라 나는 일한다'는 기본자세에 더하여 한국인 특유의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자기가 널을 뛰어도 나는 별 흔들림이 없으니 점차 그 중간 어디쯤으로 수렴하여가는 것이 느껴졌다.
어느 날 그녀의 매니저가 실태 점검 차원에서 약국에 방문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날은 내 실습일이 아니었는데 나와줄 수 있냐고 묻길래 흔쾌히 오케이 했다. 갑을 관계에서 소문자 '을'에 해당하는 주제라 선택의 여지도 없었지만. 내가 근무하던 실습 약국은 토론토 시내 한복판, 그것도 토론토 철도 교통을 관할하는 본사 같은 곳 옆에 위치하고 있어서 눈코뜰 새 없이 바빴다. 누가 오든 평가자의 상사이지 내 상사도 아닌데 싶어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일에 집중했던 것 같다. 인사를 했고, 간단한 소개 정도 했었던가. 그날 갑자기 퇴근하는 나를 부르더니 본인이 나를 매니저에게 추천했다며, 원한다면 이력서를 넣어보라고 했다. 일하기 시작한 지 겨우 일주일이고, 아직 평가는 시작도 안 했는데?!
처음에 지원한 자리는 광역 토론토 북부 지역을 메뚜기처럼 돌아다니며 일하는 포지션이었다. (여기서는 Relief 약사라고 한다.- 대기업에서 이런 식으로 인력을 채용하는 일은 꽤 흔하다. 그 덕분에 장기간 휴가도 쓸 수 있다.) 이력서를 넣고 다음날 나와 또 일하고 있으려니 전화가 왔다. 약국에서 콕 집어 '나'를 찾는 사람은 없었는데 깜짝 놀라 받으니 내 평가자의 상사라는 director 뭐시기다. 토론토 북쪽에 작은 도시에 Staff Pharmacist 자리가 비었으니 지원할 의향이 있냐며. 그쪽으로 지원만 해주면 내가 원하는 서포트를 다 해준다고 했다. 나로서는 거절하기 어려운 제안이었다. 일단 지원하면서도 'Relief'라는 일의 특성이 나의 성격에 딱 맞는 형태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서포트를 받지 않으면 비자 때문에 곤란한 일이 생길지도 몰라 걱정하던 터였다.
평가가 끝나고 합격을 한다면 취업 자리를 찾아야 할 텐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하나 지레 마음 졸이던 나의 불안은 이렇게 해소되었다. 평가자 본인이 나를 추천해서 입사까지 결정해 놓고 불합격을 시킬리는 없으니 -환자를 위험에 빠트리지만 않으면- 남은 평가기간도 수월할터였다. 입국하고 1년 반 만에 마음이 놓이며 이 나라 여름이 달리 보였다.
그때부터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실습 종료와 동시에 30편의 리포트를 제출하고 평가를 마쳤으며, 온타리오주 약사회의 등록 절차도 끝났다. Congratulation! 이메일은 곱게 별표롤 달아 중요편지함에 넣어두었다. (스크린샷도 찍어둠) .. 물론, 말로 다 못할 만감이 교차한 것도 사실이다. <은전 한 닢>의 노인이 된 기분이었다. 무엇을 위해 이렇게 했냐고 물으면 달리 답할 말이 없다. 시작했으니 끝을 봤다는, 그 정도? 그래- 어찌 되었든 시험은 끝이다. 하늘은 파랗고 공기는 맑고 애들은 잘 놀고 그러면 됐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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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훔친 것이 아닙니다. 길에서 얻은 것도 아닙니다. 누가 저 같은 놈에게 일 원짜리를 줍디까? 각전 한 닢을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동전 한 닢 주시는 분도 백에 한 분이 쉽지 않습니다. 나는 한 푼 한 푼 얻은 돈에서 몇 닢을 모았습니다. 이렇게 모은 돈 마흔여덟 닢을 각전 닢과 바꾸었습니다. 이 돈을 얻느라고 여섯 달이 더 걸렸습니다."
그의 뺨에는 눈물이 흘렀다. 나는,
"왜 그렇게 까지 애를 써서 그 돈을 만들었단 말이오? 그 돈으로 무엇을 하려오?"
하고 물었다. 그는 다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이 돈, 한 개가 갖고 싶었습니다."
피천득 <은전 한 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