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아버지의 날 (Father's day)"
한국에는 어버이날이 있지만 북미권에는 어머니의 날 (5월)과 아버지의 날 (6월)이 따로 있다. - 어린이날은 없다.- 어머니의 날에는 마트 안에 꽃이 매진되는 진풍경을 볼 수 있다. 반면 아버지의 날에 기획되는 이벤트는, '낚시 허가증 이틀 무료' 또는 자동차 수리 공구나 정원 관리용 공구 세일 상품들을 주로 볼 수 있다. 이쯤 되면 하늘을 14시간 날아 지구 반대편에 와서도 느낄 수 있는 성차별(?)이라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우리 약국에 오래 다니시는 할머니 한 분이 오늘은 할아버지와 함께 오셨다. 70이 넘어서도 여전히 소녀 같은 할머니는 자주 아팠다. 우울증 이랬다가 불안장애랬다. 잇몸에 자꾸 피가 나고 아프다며 치과를 종류별로 다니셨다. 한 번은 또 피부암 진단을 받았다고, 귀 옆의 피부를 떼어 암을 제거한 자리에 이식했다고 했다. 정말 소녀 같고 너무 귀여우시지만 그만큼 예민해서 나를 오래도록 힘들게 했는데. 그녀가 새로운 약을 처방받기라도 하면 약국에 근무하는 모두가 알 지경이었다. 구글에 나온 0.1% 확률의 이상반응도 샅샅이 뒤져내어 본인이 바로 그 부작용을 겪고 있다며 하루에 다섯 통 여섯 통씩 약국으로 전화를 해대기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 옆을 묵묵히 지켰다. 어느 날엔가 할머니가 오랜 항문 열상으로 고생하실 때에는 열상이 어느 방향으로 생겼고, 무슨 색깔인지까지 들여다 보아주실 정도로. 할아버지가 안 계신 할머니를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러다 오늘은 처음, 정말 처음으로 할아버지의 처방전을 받았다. 고용량 스테로이드이기에 여태 건강하시다 무슨 일이지 싶긴 했다. 상기도감염이 심해도 스테로이드 단기간 쓰고 감량하기도 하니까 큰 일은 아닐 거라고 여겼으나. 할머니의 손을 잡고 나타난 할아버지의 안색이 영 좋지 않아 내 마음도 덜컥 내려앉았다.
"처음으로 할아버지 처방전이 나왔네요!"
"응, 그런데 병명이 좋지 않아. 류마티카... 뭐랬더라? 근육에 힘이 빠지고 온몸이 저릿하게 아프더니"
류마티스성 관절염보다도 흔치 않은 자가면역 질환의 일종이었다. 일단은 고용량 스테로이드 먼저 쓰고 반응을 보자고 했다는데, 할아버지는 류머티즘 내과 전문의를 보기도 전에 이미 기운이 없으시다. 아니나 다를까 할머니는 이미 눈빛이 흔들리신다. 할머니가 일흔 넘은 나이까지 진정 소녀 같으신 데에는 다 이유가 있겠지. 할아버지가 여든 후반이신걸 보니 아마 나이차이가 꽤 나는, 귀엽고 예쁜 아내를 만나 평생 든든한 베필 역할로 살아오셨던 것 같다. (가만 보니 내가 정말 성차별적인 문구를 쓰는 것 같은데, 그 노부부가 그렇다는 이야기다. 할아버지는 단단한 나무 같고 할머니는 데이지 꽃 같은 이미지라서.) 앞으로 어떤 결과를 들을지 모르는 할아버지보다도 할머니가 걱정되는 내 마음을 아실는지. -아니, 아마 할아버지도 이미 그 걱정을 하고 계실 것 같다.
일흔이 넘어 결혼한 지 30주년을, 40주년을 기념한다는 노부부의 소망은 단 하나다. 당신들의 배우자가 지금처럼 잔잔히 아프더라도 조금 더 오래 살기를. 그래서 할아버지가 주로 편찮으시면 할머니가, 할머니가 몸이 좋지 않으시면 할아버지가, 그 누구보다 살뜰히 약이며 건강식품을 챙겨가신다. 불편한 걸음을 서로의 몸에 기대어가며 손을 꼭 잡고 오셔서는 눈을 흘기면서 혼자 쇼핑하라고 둘 수가 없다며 서로에게 귀여운 핀잔을 하실 때에는 부디 이대로 몇 년은 더 함께 걸어오시기를 소망해드리곤 한다.
여섯 살이나 많은 우리 신랑도 건강하기를. 애들이 이제 겨우 초등학생인데, 앞으로 갈 길이 구만리구만. 애들 다 키우고 아버지의 날 어머니의 날 챙겨 먹으며 크루즈로 여행 다니는 노후를 즐기려면 제발 운동 좀 하기를!! 아버지의 날을 기점으로 앞으론 같이 운동을 해야겠다. - 비록 선물은 서점 기프트카드를 줬지만. (나중에 내 거 사라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함께 견뎌내는 일이라는 걸 나는 나중에야 알았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박완서
나중에 알고 늦었다 후회말고 옆에 있는 지금 조금만 더 잘해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