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 맺기에서 언어란.

이민 1세대의 분투와 <The Little Prince>

by 약방서가

보통 약국에서 하루에 11시간을 근무한다. 가까운 도시에만 가도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뒤섞여 설령 아주 독특한 억양의 영어라 할지라도 별로 특이한 점을 느끼지 못하는 반면 내가 사는 이 도시는 인구 25000명의 소도시인 데다 대개 캐나다에서 오래도록 사시던 분들이 은퇴하고 조용히 살 곳을 찾아 모여드는 동네이다 보니 인구의 85% 정도가 우리가 흔히 native speaker라고 생각하는 영어를 구사한다. 하루를 마치고 일기장을 펼칠 때 내 마음의 만족도는 내가 뱉은 의사소통의 정도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 하필 나를 만난 환자가 혹시라도 흡족한 설명을 듣지 못했을까 봐 노심초사하는 날들.


당연히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일 년쯤 지나고 보니, 언어란 건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잘 벼려진 훌륭한 도구가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설령 좀 모나다 할지라도 어떻게 쓰는지에 따라 어느 정도는 유용할 수 있겠다는 깨달음이라고나 할까? 한 약국에서 일을 하면 결국 만나는 사람들을 계속 만나게 되는데, 그렇다 보니 나도 그쪽 영어에 익숙해지듯 그들도 내 영어에 익숙해진다. (좋은건지 아닌지는 모르겠음) 그렇게 한 걸음씩 친해지다 보면 어렵던 스몰토크도 하게 되고, 원하는 것 -정확한 약을 필요한 순간에-을 주는 사람이라는 경험치가 계속 쌓이게 되고, 결국 그 모든 것이 신뢰로 남는 것 같다.


무엇보다, 우리 이제 '서로 안다'는 느낌이 주는 안정감이 있다. 요즘 둘째와 같이 <The Little Prince>를 읽다 새삼스럽게 다시 생각해 보게 됐다.


“I am looking for friends. What does that mean -- tame?"

"It is an act too often neglected, " said the fox. "It means to establish ties."

"To establish ties?"

"Just that, " said the fox. "To me, you are still nothing more than a little boy who is just like a hundred thousand other little boys. And I have no need of you. And you, on your part, have no need of me. To you I am nothing more than a fox like a hundred thousand other foxes. But if you tame me, then we shall need each other. To me, you will be unique in all the world. To you, I shall be unique in all the world....” <The Little Prince>


크게 의도한 것은 아닌데도 멀리서 익숙한 얼굴이 보이면 나도 모르게 크게 웃나 보다. 이름을 기억하게 되고, 약을 먼저 집으며 안부를 묻는 과정이 자연스레 흘러갈 때의 내가, 나조차도 생경하다.

환자한테 꽃도 받았다고. 엣헴.

상호작용과 잠재적인 이상반응을 파악하고 적절하게 개입하는 경험이 늘어날수록, 환자랑 충분히 상의한 후 복용 편의성을 고려하여 처방 변경을 제안했을 때 그것이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계속할수록 자신감이 붙는 것도 사실이다. 어차피 나의 일이란 말을 굴러가게 잘하는 것보다는 정확하게 판단하고 적시에 개입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기도. (당연히 말도 잘하면 좋다.. 흑흑)


최근에 계속 캐나다에, 특별히 이 타운에 와줘서 고맙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니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면서 내 안의 인정욕구가 이렇게 컸었나를 재확인하고 있다. 주차장에서 친구를 만났는데 내 이야기를 하더라며, Asian girl (인종차별이라기보다 진짜 내가 거의 유일한 Asian girl)이 사랑스럽다고 그래서 자기도 정말 크게 동의하고 왔다는 할머니가, 꽤나 위험한 수술을 받고 나왔는데 가장 먼저 내 생각이 났다며 전화로 안부를 전하는 할아버지가, 이틀 정도 비번이라 약국을 비우면 어디 갔었냐며 인사하러 들렀다는 또래 환자가 있어서 행복해진다. 그래, 인정욕구가 크다는 사실까지 과감히 '인정'한다. 이렇게 말해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졸아든 자존감을 다소간 펼 수 있다.


혹시라도 이 글이 뒤늦게 외국어와 씨름하는 누군가에게 가 닿는다면, 우리 기죽지 말자고 말하고 싶다. 만리타국이라도 결국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접점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다르지 않다는 느낌. 별에 하나뿐인 장미에 물을 주는 마음으로 모두를 대할 수만 있다면 Broken English를 내뱉고 자책하는 마음을 다독여주어도 되지 않을까?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다들 알아주더라니까.


“And now here is my secret, a very simple secret: It is only with the heart that one can see rightly; what is essential is invisible to the eye.” <The Little Prince>


- 그럼에도 나의 분투는 계속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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