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걸 모두 '진상'이라고 얼버무릴 수는 없지만.
어쩌면 조금은 조심스러운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관계에서 힘도 많이 얻지만 어려움도 많이 겪는 법이니 기억에 남는 일들만 풀었으려니 이해해주시면 대단히 감사드림.
하필 왜 이런 소재가 생각났느냐 하면, 온타리오 주에서 일하는 약사에게 8월이란 'Happy Deductible Month' 이기 때문이다. 한국과 달리 캐나다는 (적어도 내가 일하는 주는) 약값을 100% 정부가 부담하지 않는다. 정부가 부담해 주는 대표적인 그룹은 역시 65세 이상의 시니어들이다. 그들마저도 소득 수준에 따라 적게는 $2에서 많게는 약 $4까지 본인부담금이 있다. 문제는! 1년에 단 한 번. 8월부터 연간 $100의 "기초공제액"을 지불해야 그다음부터 정부 보조가 제대로 작동한다는 사실. 매해 이맘때면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일단 한숨을 크게 쉰다. 분명히 65세가 되신 그 해부터 계속 내셨을 텐데, 어쩌면 그리 매번 "한 번도 이런 금액을 내본 적이 없다"는 말씀을 하시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 나이가 들면 최근 기억이 먼저 휘발한다는데 그래서 그러신가 연민의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가끔은 나이가 들면 어린애가 된다는 말에 연민을 보내야 할 때도 있다. "나를 모르느냐 하지 마시고 동명이인이 있으면 큰일이 나니 신분증을 제시해 달라"는 어느 주민센터의 사진 앞에서 연방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본인을 먼저 알아보면 금세 얼굴이 환해지시고, 잠시 망설이다 "그런데 이름이?" 하면 '그럼 그렇지' 낙담하는 얼굴이 표가 난다. 낙타에서 사자, 그리고 어린아이가 되는 것이 초인이라는 니체의 철학을 떠올리게 된달까. 서운해만 하시면 좋을 텐데 마약류 의약품 때문에 신분증이라도 받을라치면 이제 난리가 나는 것이다. "나를 모르느냐"면서. 우리도 같은 표지판을 하나 세워야 하나 싶을 정도다. 초인은 아니 되셔도 좋으니 신분증이 필요한 건 내가 아니라 당신들의 정부라는 사실이나 알아주셨으면.
가장 하이라이트는 마약류 의약품이다. 한국 정서와 너무 맞지 않아서 언제나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다. 일단 한국에서 마약성 진통제를 먹는 경우는 극히 드물지만 이곳에선 치과진료만 해도 턱턱 처방이 나간다. 염증성 관절염에 마약성 진통제는 표준 치료법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소염제 먼저) 몇 년간 아예 달고 사신다. 그러면 보통 오남용을 막기 위해 대량을 한꺼번에 불출하지 않고 소량씩 나누어 가져가게 (예를 들면 1일 1회 투약하는 약을 총 180알 처방했을 때, 90일씩 두 번에 나누어 조제)하고, 기한이 되지 않으면 재불출 하지 않는 것이 원칙 (예시에서 90일이 도래하기 이전에는 총량이 남아있어도 조제해주지 않음)이다. 영원히 해결되지 않는 갈등의 시작이라는 것. 기한이 될랑 말랑하면 득달같이 전화가 와서 다음번에 약 받는 날이 언제인지, 그날 약국이 틀림없이 여는지, 재고가 반드시 있는지 적어도 두세 번은 확인하셔야 직성이 풀리시고 당일에는 내가 출근하기도 전에 약국 앞에 서계시기 일쑤다. 게다가 본인이 날짜 잘못 세셨지만 일단 우길 때는 한국말로 쏘아붙이고 싶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 -그래서 컴퓨터 계산기 기능을 아예 날짜로 바꿔놓고 사용하고 있다.
물론 내 억양이 알아듣기 힘들다거나, 본인은 이민자에 반대하는 입장이라는 말을 굳이 내게 해주시는 분들도 있긴 있다. (지금까지 각각 한 명 정도 만난 것이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외강내유의 경계성 불안장애인지라 대인배처럼 웃어넘겼다고 쓰지는 못해도 고마운 동료들이 대신 화를 내주니 힘내어 내 자리에 설 수 있는 것 같다.
의외로 진상(?) 환자를 대하는 법은 간단하다. 다음에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면서 대하는 것이다. 소리를 질렀건, 짜증을 냈건, 그 순간이 지나고 웃으면서 다가가면 그다음, 또 그다음에는 "너는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주려고 하는 사람이지!"라고 해주신다. 본인이 뱉었던 말들은 누구보다 본인이 가장 잘 알고 머쓱해하시므로 모르는 척해드리는 것이 '공경'이라고 해야 하나. 거 참, 동방예의지국에서 온 걸 다행으로 아시길. (-_-)
*여기에 담지 못한 이야기가 더 많다. 하나 말할 수 있는건, 그래도 캐나다인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양반이라는 것이다. 하하하하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