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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백 Oct 23. 2021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잉게 숄

교정은 조용할 날이 없었다. ‘○○○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며 학생들이 떼를 지어 몰려다녔다. 나는 강의실에서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밖을 내다보았다. 진압복과 투구를 쓴 전경들이 한 손에는 방패를, 다른 손에는 곤봉을 쥐어 잡고 교문 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학생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폭죽을 쏘아대듯 최루탄이 날리고 뿌연 연기가 교정을 뒤덮었다.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흩어지는 학생들과 곤봉을 휘두르며 뒤를 쫓는 전경들이 뒤섞여 시위현장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나는 눈물 콧물을 흘리며 매캐한 냄새와 그들로부터 최대한 멀리 달아났다.


 10•26사태가 일어난 다음해 봄이었다. 그동안 활동을 금지 당했던 정치인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고, 대학생들은 민주주의를 외치며 거리로 나왔다. 그 대열에 합류하는 시민도 늘어갔다. 시위현장을 비춰주는 티브이 화면은 모여든 인파로 터져 나갈 것만 같았다. 그 많은 사람들은 모두 어디에서 왔을까. 내 주변에는 운동권 학생도 없고 생업을 포기하고 시위에 가담하는 일반인도 없었다. 실상 정권을 장악하려는 신군부의 음모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안다한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 생활터전을 묵묵히 지키고 있었다. 

  

시위가 있는 날이면 학교 앞 도로는 차량이 통제되었다. 현장에서 빠져나온 학생들은 패잔병처럼 도로 위를 터벅터벅 걸었다. 걷다보면 명동이 나왔다. 친구들과 기웃대던 명동의류 매장에는 언제나 경쾌한 음악이 울려 퍼졌다. 안으로 들어서면 환한 조명 아래 갖가지 진열된 옷들이 나를 반겼다. 전공 특성상 다양한 디자인을 접한다는 이유로 자주 들렀지만 그보다 미팅에 입고 나갈 옷을 고르는데 정신이 더 팔렸다. 나는 옷을 구경하면서도 도망쳐 나온 캠퍼스가 자꾸만 떠올랐다. 학업에 충실하면서 제 갈길이나 가면 될 걸, 저들은 무엇을 어찌하겠다고 부르짖는 것일까. 


  시위는 갈수록 퍼져나가 광주에서도 학생과 시민들이 격렬하게 일어났다. 계엄군에게 점령당한 도시에서 대학을 다니던 막내오빠와도 연락이 끊겼다. 아버지는 이백리 길을 자전거를 타고 아들을 찾아 나섰다. 군인들이 있는 곳을 피해 사흘 밤낮을 엉덩이가 짓무르도록 달려 도착한 자취방에 아들은 없었다. 주인아주머니 말을 듣고 찾아간 곳에 오빠는 피신해 있었다. 아버지에게 끌려 고향으로 왔지만 오빠의 마음은 온통 전쟁통 같은 광주에 쏠려 있었다. 


나는 그 도시의 시민들이 사투를 벌이는 열흘 동안 여전히 학교를 다녔다. 신군부는 오히려 그들을 폭도로 몰아세우며 존재감을 확실히 드러냈다. 민주주의의 꽃망울이 피기를 기대했던 시민들은 자유를 억압하는 세력의 손아귀에 또다시 사로잡혔다. 자유란 짓밟힐수록 솟아나는 것인지, 교정에는 독재를 타도하자는 대자보가 나붙고 시위는 더욱 격렬해졌다.  


잉게 숄의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을 읽는 내내 위기 상황을 직면하지 못하고 도망 다니던 대학시절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뮌헨대학 의대생인 한스 숄과 여동생 죠피 숄. 그들은 대학생과 지식인들을 모아 ‘백장미’단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나치의 독재와 유대인 학살, 전쟁의 참상을 비판하는 전단을 돌리며 저항 운동을 벌였다. 20대의 꽃다운 나이에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그들의 외침은 우리네 80년대 학생들의 외침과 닮아 있었다.  


신영복은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행렬에서 아예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겁이나 옷 구경을 가고 미팅을 하며 현실로부터 도피하기에 급급했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을 때 치러야할 대가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입만 뻥끗해도 잡혀가는 세상이었다. 그들이라고 두렵지 않았을까. 기쁨과 공포, 승리감과 비애, 의심, 모험이 뒤엉킨 속에서 하루가 지나갔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들은 단지 인간적인 세계에서 인간답게 살기를 희망했을 뿐이다. 쓰러져간 오월의 청춘들에게 묻는다면 한스 숄처럼 모든 것은 스스로 선택한 길이었다고 당당하게 말할까. 아니면 조피 숄처럼 자유 만세! 라고 외쳤을까. 책을 읽는 내내 ‘무관심의 벽을 허물어라. 잠에서 깨어나라.’는 백장미단의 외침이 교정을 울리던 함성으로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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