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지 속의 여자

by 동백


별도 달도 침묵하는 밤이다. 길가에 늘어선 나무들도 숨죽이며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만 간간이 들려올 뿐이다. 좁은 차 안에 흐르는 긴장감이 풍선처럼 부풀어 터져 버릴 것 같다.


우리는 남도의 끝자락에 머물고 있다. 찌는 더위는 파도타기를 하듯 낮이면 밀려왔다 밤이면 멀어진다. 어스름한 저녁 앞바다에서 잡아 올린 해산물을 안주삼아 술잔을 기울였다. 우리는 연신 잔을 부딪치며 술기운으로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한창 분위기가 익어갈 무렵 싸움이 벌어졌다. 취기가 오른 그와 오기가 발동한 나는 팽팽히 맞섰다. 그는 자기 말을 무조건 인정해주기를 바랐다.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둘이서 으르렁거리는 소리는 간간이 들리는 개 짖는 소리를 덮어버렸다.


오빠의 절친이였던 그와 나는 오누이처럼 지내다 부부가 되었다. 그는 남자다우면서도 자상하다. 사춘기 시절부터 나에 대한 애정이 깊어 함께 있으면 특별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본격적인 연애는 결혼 후에야 시작되었다. 그의 고집과 가부장적인 모습이 드러난 것도 이때부터였다.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나 했더니 아내라는 단단한 틀에 갇혀 버렸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구속에 숨이 막혔다. 우리는 각자의 언어로 외쳐댔다. 나를 좀 알아달라고, 그냥 좀 내버려 두라고. 샬롯 퍼킨스 길먼의 소설 <누런 벽지> 속 그녀도 이런 상황이었을까.


상상력이 풍부하고 이야기 지어내기를 즐겨하는 그녀는 우울증을 앓고 있다. 내과 의사인 남편은 아내가 자기의 지시대로만 움직여 주기를 원한다. 남편의 꼭두각시로 살아가는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종일 벽지를 바라보는 일이다. 어느 날부턴가 그 속에 갇힌 여자들의 환영이 보이기 시작한다. 낮이면 겹겹이 바른 벽지에 제압당한 듯 조용하던 여자들이 밤이면 그곳을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친다. 그녀는 여자들을 밖으로 내보내기 위해 밤마다 벽지를 뜯어낸다. 자신만의 세계에서 서서히 미처 가던 그녀가 깨닫게 된 것은 벽지 속에서 자신을 구해내는 일이다.


술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간 그를 따라 차에 올랐다. 밀폐된 공간에서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숨이 막힌다. 폭발하려는 마음을 잠재우기 위해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길가 나무들은 내 시선에 아랑곳 않고 꿋꿋이 서 있다. 히말라야시다만 바닷바람에 길게 뻗은 가지들을 주체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다. 히말라야에서 어쩌다 이곳까지 왔는지, 낯선 땅에 적응하기 위해 오랜 시간 견뎌 왔을 것이다. 몸부림 같기도 하고, 자유로운 손짓 같기도 한 나무의 몸짓에 온통 마음이 실려 갔다.


다툼이 일 때마다 대면하기를 거부하고 입을 닫은 것이 오히려 비겁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를 방어하기보다 그에게 한 치의 틈도 내주지 않겠다는 저항이었는지 모르겠다. 내 침묵에 답답하기는 그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오늘은 갯벌처럼 질척하게 토해 냈으니 공평한 싸움이다. 속이 후련하다. 내친김에 먼저 말을 걸려는 순간 그가 먼저 입을 연다. 미안하다고…. 이번에도 마무리는 그의 몫이다.


소설 속 그녀는 아직 사투 중이다. 문을 두드리는 남편이 열쇠를 따고 들어오기 전에 여자들을 구출해 내야 한다. 미친 듯이 벽지를 떼어내는 아내를 보고 실신한 남편을 향해 그녀가 소리친다.

“나 드디어 나왔어요. 당신의 반대를 무릅쓰고요. 당신은 도로 나를 집어넣을 수는 없어요.”


제가 살던 곳과는 다른 땅에 깊게 뿌리를 내린 나무는 하늘로 치솟아 아름다운 정원수가 되었다. 우리는 자웅동체 히말라야시다처럼 함께 꽃 피우고 열매 맺었던 날들을 떠올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누런 벽지 한 겹이 벗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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