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리 회원들과 연극을 했다. 연극은 각자 원하는 삶을 무대에 올려보자는 의도에서 시작되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쓰고, 초빙한 연출자가 그것을 대본으로 만들었다. 몇 달 동안 연습 끝에 소극장을 빌려 ‘제2의 출생신고’라는 제목으로 무대에 올렸다. 열한 명이 각각 주인공으로 서는 무대에서 나는 꽃집 여자가 되었다.
무대에 서자 조명이 켜졌다. 주민자치센터에 출생신고를 하려는 사람들이 서 있고 직원은 서류 접수를 하고 있다.
꽃집 여자: 제 새 이름 동백이에요. 그 꽃말이‘당신을 열렬히 사랑합니다’래요. 제2의 인생을 오롯이 나를 사랑하며 살아가겠다는 의지가 담긴 이름이에요.
직 원: 아, 그래서 꽃집을 차리신 거예요? 꽃집 이름이 …‘꽃이 피었습니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동백이 좋았다. 저수지 가에 있던 제각은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사당 아래 펼쳐진 양지바른 동산에는 잔디로 뒤덮인 무덤들이 능선처럼 이어져 있었다. 그 가장자리에는 오래된 동백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동백나무 아래서 위를 올려다보면 꽃은 나무가 아닌 하늘에서 피어났다. 바람이 불면 잎을 따라 꽃이 흔들렸다. 반지르르 윤이 나는 진초록 잎 사이로 새색시 다홍치마 같은 겹겹의 꽃들이 대비를 이루며 둥둥 떠다녔다. 그 춤사위에 빠져 꼼짝 않고 서 있으면 친구들의 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그곳에는 오직 동백과 나뿐이었다. 나는 사계절 그곳에서 뒹굴며 동백과 사랑에 빠졌다.
꽃집 여자: 평범하게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다 결혼을 했지요. 이십여 년 동안 가족 챙기랴, 내 일 하랴. 어느 순간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고 느끼던 때였어요. 오른쪽 가슴에 딱딱한 것이 잡히고 누르면 아프더라고요. 검사를 받고 결과를 들으러 간 날, 의사가 두 번이나 내 이름을 확인했어요.
의사: 보호자와 같이 안 오셨습니까?(뜸 들이다 결심한 듯) 암입니다. 제가 소견서 하나 써드릴 테니 대학병원으로 가보세요.
꽃집 여자: 저… 선생님, 제게는 어린 딸이 있어요.
늦둥이인 나는 늘 어머니의 근심거리였다. 공부를 시킨답시고 일찍 도시로 내보낸 것도 그렇고, 시집을 보낼 때까지 당신이 살아있을까 불안해하셨다. 어머니는 새 집 짓고 소띠 해 겨울밤에 태어났으니 복덩이라는 외할머니 말씀을 그나마 위로 삼았다.
어머니는 내가 늦둥이를 낳았을 때 문어를 사다 미역국을 끓여 주셨다. 나도 어머니처럼 오래오래 살거라 안심했다. 그런데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살 수는 있는지, 병마가 이미 내 몸을 점령해 버린 것은 아닌지. 어린것을 도회지로 올려 보내고 하루도 맘 편할 날이 없었다던 어머니의 전철을 밟지 않으리라 다짐했었다. 딸아이는 열두 살이었다.
고향을 떠나온 이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서울 학교는 내가 다니던 학교보다 몇 배는 더 컸다. 명절에나 한 번씩 보던 언니 오빠들은 남의 식구처럼 어려웠다. 나는 낯선 환경에 자꾸 움츠려 들었다. 학교가 파하면 집 근처 성터에 올라 허물어진 돌담 사이를 쏘다녔다. 그리움에 지쳐 빨갛게 멍이 들었다는 동백처럼 가슴 한켠이 항상 아렸다.
나는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며 가족들의 기대에 맞추려 애썼다. 말썽 없이 학업을 마치고 직장에 다녔다. 결혼 후에는 아내와 엄마, 며느리, 직장인이라는 이름 중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모든 일을 완벽하게 해내려던 강박이 화근이 되었을까. 몸은 그런 내 의지를 거부했다.
꽃집 여자: 수많은 어여쁜 꽃들 다 제쳐두고 암꽃이 피었다고…그런데 수술을 하고 병실에 누워 있는데 그렇게 편할 수가 없더라구요. 그제서야 나를 짓누르고 있던 것들로부터 해방된 것 같았어요. 내 안에 피었다는 그 꽃이 너무 좋더라구요. 피주머니를 주렁주렁 달고서도 방실방실 웃고 다녔으니까요.
수술대에 오르자 마취는 모든 것을 잊게 해 주었다. 눈을 뜨니 회복실에서 고르게 숨을 쉬고 있었다. 액운을 쫓는다는 동백나무 망치라도 맞은 것일까. 생과 사를 저울질하던 나쁜 덩어리가 뚝 떨어져 나갔단다. 치료만 잘하면 아무 문제없다 했다.
꼼짝없이 갇힌 병실에서 나는 어느 때보다 편안했다. 잘 해내야만 한다는 신념에 얼마나 힘을 주고 살았던지, 조바심치며 나를 몰아붙이던 강박까지 다 도려 낸 것 같아 후련했다. 나를 옥죄던 것들이 헐렁한 환자복 사이로 자꾸 풀어져 내렸다.
가을에 시작된 치료는 겨울에 끝이 났다. 방사선 치료 마지막 날 옛 동산을 찾아갔다. 선명하게 핀다는 꽃은 봄으로 가는 길목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온 에너지를 집중해 대책 없이 타오르다 한순간 지는 동백의 결기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 들고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동산에서 뒹굴던 아이를 만났다.
가지에서 한 번, 통으로 땅에 떨어져 또 한 생을 산다는 동백처럼 붉은 나무 아래서 나는 다시 피어나는 것 같았다.
무대가 화려한 조명으로 바뀌며 음악이 흐른다.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는 ‘아모르 파티’에 맞춰 꽃집 여자, 행복한 모습으로 춤을 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