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에세이
올 겨울도 많이 추웠지만 가끔 따스했고,
자주 우울했지만 어쩌다 행복하기도 했다.
올 겨울의 희망도 뭐니뭐니해도 역시 봄이고,
봄을 믿을 수 있는 건 여기저기서
달콤하게 속삭이는 봄에의 약속 때문이 아니라
하늘의 섭리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p.27)
오랜만에 찾아간 서점 에세이 코너에서 발견한 박완서 작가님의 새 에세이집.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고, 그 많은 책을 누가 다 사갈까봐 잠시 걱정하며 아무도 모르게 재빠른 눈짓으로 가장 예뻐보이는 책을 한권 고르고 마파에게 "나 이거 사줘, 꼭 사줘야 해." 하며 오랜만에 들뜬 마음으로 서점을 나섰다.
책 표지도 적당히 안정감 있게 두껍고, 표지 디자인은 또 왜 이렇게 작가님을 닮아서 서정적이고 아름다운지...
'박완서님이 세상을 떠난 10주기' 라고 들어서인지 한참을 표지조차 넘기지 못했다. 시간을 두고 표지를 넘겼으나, 프롤로그도 그냥 넘기지 못했다.
(아..이 책 읽으려면 한 달은 걸리겠구나 싶었다..)
20대 때 뭣도 모르며 그녀의 글을 사랑했고, 그녀의 소설 속으로도 그냥 느낌적인 느낌으로 빠져들었다 나오기를 반복했었다. 그리고 직장 생활, 임신과 출산-육아, 어른으로 한 걸음 나아가는 고독의 길을 통과하고 나서 생각의 숨결이 시작된 시점에 다시 만난 작가님의 글은 나에게 '사랑의 길을 걷고 있노라, 변함없는 길을 잘 가고 있다' 고 위로해주었다.
이 에세이 집을 읽으며 작가님은 생각보다 훨씬 더 예민하고 민감하며, 솔직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느끼는 날 것의 것들을 그대로 두지 않고, 겹겹이 쌓아올려 다정한 마음으로 세상에 내놓으셨다.
작가님처럼 인생을 6-70년은 그런 성숙하고 다정한 마음으로 쌓아올려야 안정되게 살수 있나, 성숙한 삶이 머나먼 구름 보듯이 아련했지만, 사실 작가님은 그저 매번 여느 청춘의 파도처럼 한결같이 불안해 했고, 그저 그 마음을 흘려보내지 않고 살뜰히 쓸어담아 관찰했고, 돌보았고, 사랑했다.
그렇게 나온 보석같은 마음들이 담긴 이 소중한 책은 정말이지, 내 아이에게도 꼭 들려주고 싶은 글들이다.
무수한 아픔들도 빛을 발하게 했던, 자신만의 방식을 소중히 사랑했던 작가님을 닮고 싶다.
행복하라 권하는, 충분히 빛이 나고 있다 응원하는 그녀가 보고싶다.
그 중 가장 인상깊었던 에세이 <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
홀로 고독한 아이로 발을 땅에 힘겹게 내딛고 있었던 나의 유년시절을 따스히 안아주었고, 우리 아이들도 이렇게 안아주고 싶은 글이었다.
편안하고 깊은 어른이 전하는 사랑의 향기.
<깊이 만난 문장들>
우리 어머니가 팔십 평생을 회고하며 자신있게 못 된 사람 만난 일 없다고 술회할 수 있듯이 세상엔 믿을만 한게 훨씬 더 많다. 우리가 믿음에 대해 쉬 잊고 배신을 오래 기억하며 타인에게 풍기지 못해 하는 것도 우리의 평범한 일상의 바탕이 불신이 아니라 믿음이기 때문일 것이다. (p.24)
올 겨울도 많이 추웠지만 가끔 따스했고, 자주 우울했지만 어쩌다 행복하기도 했다. 올 겨울의 희망도 뭐니뭐니해도 역시 봄이고, 봄을 믿을 수 있는 건 여기저기서 달콤하게 속삭이는 봄에의 약속 때문이 아니라 하늘의 섭리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p.27)
사람들이 갈수록 똑똑해지고 있다. 그럴수록 불쌍한 이웃을 보면 이런 똑똑하고 지당한 이론대신 반작용처럼 우선 자비심 먼저 발동하고 보는 덜 똑똑한 사람의 소박한 인간성이 겨울철의 따뜻한 구들목(온돌방의 바닥중 아궁이에 가까운 쪽) 이 그립듯이 그리워진다.
이 서글픈 시기를 그렇게 곱디곱게 채색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내가 만난 아름다운 것들이 남기고 간 축복이 아닐까? 예사로운 아름다움도 살 날보다 산 날이 많은 어느 시기와 만나면 깜짝 놀랄 빼어남으로 빛날 수 있다는 신기한 발견을 올해의 행운으로 꼽으며 1982년이여 안녕.
부자가 되거나 권세를 잡거나 전문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것이 개인의 특별한 능력이듯이 행복해지는 것도 일종의 능력입니다. 그리고 그 능력은 성공한 소수의 천부적 재능과는 달리 우리 인간 모두의 보편적인 능력입니다. 창조주는 우리가 행복하길 바라고 창조하셨고 행복해질 수 있는 조건을 다 갖춰주셨습니다. 나이 먹어 가면서 그게 눈에 보이고 실감으로 느껴지는데 그게 연륜이고 나잇값인가 봅니다. (p. 138)
그리고 요새 청소년과 젊은이들의 문제를 입시와 결혼으로 간단하게 요약해버리려는 우리 세대의 사고방식과 상상력의 빈곤에 문득 혐오감 같은 걸 느끼게 된다. (p.180)
내 기억의 창고도 정리 안한 사진 더미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건 뒤죽박죽이고 어둠 속에 방치되어 있고 나라는 촉수가 닿지 않으면 영원히 무의미한 것들이다. 그 중에는 나 자신도 판독 불가능한 것이 있지만 나라는 촉수가 닿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빛을 발하는 것들이 있다. 아무리 어두운 기억도 세월이 연마한 고통에는 광채가 따르는 법이다. 또한 행복의 절정처럼 빛나는 순간도 그걸 예비한 건 불길한 운명이었다는게 빤히 보여서 소스라치게 되는 것도 묵은 사진첩을 이르집기 두려운 까닭이다. 당시에는 안 보이던 사물의 이중성과 명암, 비의가 드러나는 것이야말로 묵은 사진첩을 뒤지다가 느닷없이 맞닥뜨리게 되는 공포이자 전율이다. 나라는 촉수는 바로 현실이라는 시점이 아닐까. 이미 지나간 영상을 불러내서 상상력의 입김을 불어넣고 남의 관심까지 끌고 싶은 기억에의 애착이야말로 나의 글쓰기의 원동력의 한계 같은 것이 아닐까. 요즘 문득문득 생각한다. (p. 175-176)
자신의 삶을 통해 체험한 여자이기에 감수해야 했던 온갖 억울한 차별대우를 딸에게만은 물려주지 않으려는 어머니들의 진지한 노력과 간절한 소망에 의해 여성들의 지위가 더디지만 조금씩이라도 나아가고 있는게 아닐까. (p.202)
시간이 나를 치유해준 것이다. 이 나이까지 살아오면서 깨달은 소중한 체험이 있다면 그건 시간이 해결 못할 악운도 재앙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 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p. 2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