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심의서가 없으면 광고를 방송에 낼 수 없기에 심의에 걸릴 만한 단어, 내용은 철저히 걸러내야 하는 게 카피라이터의 임무이다. 매일 광고 심의 위원회에 전화를 걸어 시간 내에 심의서가 나올 수 있도록 독촉을 해야 하는 것도 카피라이터의 임무였다. 심의 위원회 직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중요했는데 친절한 담당자들이 있는 반면 까탈스럽고 깐깐하기 그지없는 담당자들도 많았다. 방송을 탈 수 있는 광고, 근거가 있는 허위가 아닌 광고를 증명하기 위해 수많은 서류를 증빙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그 당시 광고계의 전설적인 광고심의 일화가 있었는데 바로 마몽드 묻어나지 않는 립스틱 광고였다.
묻어나지 않는 립스틱이 어디 있냐며 광고심의위원회는 이 광고를 허위 광고라며 방송 불가 판정을 내렸다. 담당 카피라이터는 모든 증명 자료를 보내봤지만 광고심의 위원회는 방송 불가 판정을 번복하지 않았다. 그래서 담당 카피라이터가 생각해 낸 것은..
바로 새하얀 와이셔츠와 마몽드 묻어나지 않는 립스틱을 들고 광고 심의 위원회에 찾아간 것이다. 심의 위원들이 보는 앞에서 카피라이터는 자신의 입술에 마몽드 립스틱을 바른 후 바로 그 하얀 와이셔츠에 입을 비벼댔다고 한다.
립스틱은 당연히 묻어나지 않았고 그대로 하얀 와이셔츠를 보고 그제야 광고 심의 합격 도장이 찍혔다는 촌극 아닌 촌극은 실화이다.
광고심의 때문에 카피를 바꾼 적도 많았고 제시간에 심의서가 나오지 않아 발을 동동 구르며 심의 위원회에 전화통을 붙잡고 갖은 아양 떨기, 동정 작전,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심위서를 받기 위해 애간장을 태우기기 일쑤였는데…
하느님이신 광고주의 요청 시간 내에 광고를 내보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했는데 급기야 해서는 안될 일들이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바로 가짜 심의서를 먼저 만들어서 방송국에 제출하는 거였는데 주로 지방에 있는 광고회사들은 지방에 있는 이유로 광고 심의서가 늦어지는 경우가 잦아 광고 일정을 맞추기 위해 고안해 낸 방법이었다. 당연히 불법이었다.
내가 처음 광고 심의를 담당하게 되었을 때 AE 선배에게 배운 것이 가짜 광고 심의서를 만드는 것이었다. 광고 심의 번호는 10자리가 넘는 숫자였는데 그 숫자칸을 칼로 오려내서 새로운 임의의 숫자를 붙여서 다시 카피를 해서 만드는 식이었다. 이것이 바로 공문서 위조!
햇병아리 카피라이터에게는 충격의 현장이었고 선배는 다들 이렇게 한다며 나에게 가짜 광고 심의서 만드는 방법을 전수해 줬고 나는 그렇게 회사에서 불법을 행하도록 배웠다. 처음엔 충격이었는데 너도 나도 그렇게 한다는 사실에 마음은 금세 무디어졌고 심의서가 빨리 나오지 않는 광고는 그렇게 가짜 심의서를 통해 방송이 먼저 나가고 나중에 심의서를 받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런데..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했던가!
선배의 말대로 지방 광고 대행사에서는 공공연하게 가짜 심의서를 만들고 있었는데 광주에 있는 어떤 광고회사에서 이 가짜 심의서가 들통이 나게 된 것이다. 광고회사 사장님이 구속이 되었고 그 피바람은 전국의 광고 대행사 감사로 이어졌다.
내가 있던 대구에도 심의 위원회 감사팀이 내려왔다.
광고 대행사들은 발칵 뒤집어졌고 우리 회사에서도 대책회의가 열렸다. 그런데 회사에서 고안해 낸 대책이란 게 만약 가짜 심의서가 발각이 될 시에 담당자 카피라이터가 너무 무지해서 벌어진 실수라고 입을 맞추자는 것이었다. 나보고 최대한 어눌하고 멍청한 척을 하라는 거였다.
예상했던 대로 수상한 심의서가 발각이 되었고 그걸 추궁하는 감사팀 앞에서 나는
어.. 그게…
어? 이상하네…
뭐 이렇게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사람이 되었고 감사팀장은 나에게
아니, 도대체 대학을 나온 사람이 어떻게 그런 실수를 할 수 있냐며 나를 비웃고 한심해했다.
나는 모멸감과 수치심을 꿀꺽 삼키며 참아내야 했고, 그렇게 가짜 심의서는 나의 멍청함에 의한 해프닝으로 일단락 나게 되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