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피라이터는 광고 카피만 쓰면 되는 줄 알았는데 모델 하우스 안내 멘트를 쓰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모델 하우스에 들렸던 기억을 더듬으며 어떤 멘트가 나왔었는지를 떠올리려 했지만 머릿속은 텅 비는 듯했다. 어떻게 아파트 모델 하우스 멘트를 썼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나보다 1년 먼저 입사한 카피라이터는 다큐멘터리 영화 시나리오 작업도 했다는데 다행히 나는 주로 라디오와 티브이 광고를 맡게 되었다.
라디오 광고 중 기억에 남는 건 꽃가게 광고였는데 그 당시 유명했던 강남길 배우님을 섭외했다. 아내를 위해 꽃선물을 하는 남편 콘셉트이었는데 녹음실에서 만나 뵙게 된 강남길 배우님은 너무나 친절하시고 공손하셨다. 본인을 섭외해 주셔서 너무 감사하다고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시는데 그 모습이 너무 진실되고 겸손해서 지금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내가 만든 라디오 광고를 버스 안에서 처음 들었던 경험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아있다.
아주 먼 훗날 미국에서 삼성을 다니면서 서울디지털 대학교 사이버 대학 문예창작학과를 들어갔었는데 수업 과제가 평생 잊을 수 없는 가슴을 울리는 순간을 주제로 쓰는 거였다. 난 우연히 버스 안에서 내가 쓴 라디오 광고가 강남길 배우의 목소리로 흘러나온 첫 순간을 주제로 선택했을 정도로 그 기억은 내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20초의 광고가 버스에서 울리는 동안 난 사람들의 표정을 살피며 어떤 표정을 짓는지 그들의 반응을 숨죽여 지켜보며 마음속으로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이 광고 쓴 사람이 바로 저예요!
또 하나 기억에 남는 라디오 광고는 그 당시 인기 절정이었던 개그 듀오 ‘덩달이와 썰렁이’를 모델로 한 자동차 기기 광고였다. 썰렁이가 그 제품에 대해 좋은 점을 한참 나열하고 나면 덩달이가 우와 감탄사를 연발하며 자신도 갖고 싶다고 얘기하는데 마지막 썰렁이의 멘트가
자네는 차가 없질 않나
였다.
그 당시 덩달이와 썰렁이의 인기는 대단했고, 특히 덩달이역의 홍기훈 개그맨의 인기는 최고였다. 나는 먼저 썰렁이를 섭외했고 덩달이를 섭외하려는데 홍기훈의 성우료가 제작비의 몇 배를 넘어서는 거였다. 광고주에게 전달을 했지만 대답은 그만한 제작비를 댈 수 없다는 거였고 덩달이가 없는 덩달이 썰렁이 콩트 광고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플랜 B가 필요했다. 내가 생각해 낸 플랜 B는 덩달이 대신 덩달이 목소리를 흉내 낼 수 있는 개그맨 김학도 씨를 섭외하는 거였다. 그 당시 성대모사의 일인자였던 김학도 씨는 그렇게 우리의 구세주가 되었고, 광고주도 오케이를 해서 홍기훈 씨가 아닌 김학도 씨의 덩달이 버전으로 광고를 만들었는데 과연 청쥐자들은 눈치챘을지…
라디오 광고 녹음으로 만난 김학도 씨는 정말 친절하고 겸손하셨는데 내가 주차장에서 뭘 떨어뜨렸었는데 그게 자동차 밑으로 들어가 버리자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바닥에 엎드려서 주워주는 것이었다. 얼마나 죄송하고 감사하던지 아직도 그 모습이 그려진다.
또 기억나는 연예인은 하희라 씨인데 tv 광고 촬영 중에 남편 최수종 씨랑 다정하게 통화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광고 배우나 라디오 성우 섭외는 주로 카피라이터가 맡았는데 광고 섭외를 위해 연예인들의 연락처 리스트를 가지고 있었다. 그 당시 내가 푹 빠진 배우가 있었는데 바로 정우성 배우이다. 내 책상 유리 밑에는 정우성 사진이 들어가 있을 정도로 팬이었다. 그의 첫 영화 구미호를 보고 난 반해버렸고 그 당시만 해도 이제 막 유명해지려는 신인이었다. 그런데 정우성의 연락처가 내 손아귀에 버젓이 들어와 있는 것이었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꼴이었다.
난 정우성의 삐삐번호를 뚫어지게 바라보다 사고를 치고 말았다.
정우성에게 삐삐를 치고 만 것이다.
삐삐를 치고서는 바로 후회를 했다. 프로답지 못한 사심을 채우려는 내 속내가 너무 부끄러웠지만 이미 삐삐는 쳐버렸고 나는
에이 설마 연락이 오겠어하고 있는 찰나.
사무실 안데 데스크에서 울리는 소리
**** 번호로 삐삐 치신 분!
꺄악! 삐삐 회신이 와 버린 것이다.
저요! 하고 나는 냅다 소리를 지르고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전화 목소리의 주인공은 정우성이 아니었다.
그런데 본인이 정우성이라고 했다.
나는 "정우성 씨가 아닌 것 같은데요." 했더니
그는 사실 본인은 정우성 매니저라고 했다. 정우성을 바꿔달라고 했더니 홍콩에 광고 촬영을 가 있다고 했다.
이런.. 그런데 이 사람 정우성 매니저가 맞긴 한 건가? 하는 의심이 드는 찰나
그는 그런데 삐삐를 왜 치셨냐고 묻는데
난 순간, 광고 대행사 카피라이터가 정우성 팬이라서 삐삐를 쳤다고 차마 말할 수는 없었기에.
급하게 둘러대기를 경주 도투락월드 광고 모델로 섭외할까 하는데 광고료가 얼마인지 물어봤다.
조금 전까지 장난스럽게 말을 하던 정우성 매니저라는 사람은 그제야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6개월 단발 광고가 1억이라고 했다. 나는
네에? 1억요?
하고 되물었다.
그 당시 정우성은 이제 막 인기를 얻기 시작한 신인이었는데 6개월 단발 광고가 1억이라니 믿기지가 았았다.
다시 연락을 주겠노라하고 전화를 끊고 광고료에 대한 충격이 가시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 후 신문에 정우성이 광고차 홍콩에 가있다는 기사를 읽을 수 있었고 그 매니저가 가짜 매니저는 아니었구나 했다.
너무 원하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했던가. 서울 녹음실에 간 동료 카피라이터 은영 씨한테서 전화가 왔다. 전화기 너머로 그녀의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혜영 씨, 여기 정우성이 와 있어요. 바로 저기 앞에 있는데… 세상에… 빛이 나네 빛이. 연예인 안 할 수가 없는 얼굴이에요.
그녀의 속삭이는 목소리와는 반대로 나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정우성이 와 있다고요?
하고 냅다 소리를 질렀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갈 수도 있는 출장이었는데 은영 씨가 대신 간 거였다.
그 순간이 얼마나 야속하고 은영 씨가 부럽던지… 은영 씨는 정우성에겐 관심도 없는 사람이었기에… 난 더 기가 막혔다.
난 아직까지 정우성 팬이지만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다.
나이가 들수록 더욱 멋있어지는 그이기에 아직도 응원하는 중이다.
카피라이터는 카피만 쓰는 게 아니었고 내가 제일 꺼려했던 업무 중 하나가 바로 광고 심의 업무였다. 광고를 내기 위해선 먼저 정부로부터 광고 심의서를 받아야만 광고를 낼 수 있는데 카피라이터가 그 업무를 해야 했다. 촉박한 기간 내에 광고 심의서를 받아내기 위해 때론 피가 마를 때가 있었는데 어느 날 지방 광고 대행사에 피바람이 몰아닥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