⁷선배가 제시한 카피라이터 되는 법 세 가지 조건 중 첫 번째는 공채였다. 그런데 이 공채라는 게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사실. 두 번째는 대학생 광고 공모전에 당선되는 것인데 이 또한 수천, 수만 명의 경쟁을 뚫어야 하니 공채만큼이나 어려울 터. 마지막 방법은 카피라이터 이낙운 선생님이 운영하는 서울 광고 카피 아카데미에 다니는 것인데 이 또한 나한테는 불가능했다. 나는 대구에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선배는 내게 싸움을 잘하냐고 물었고 술, 담배를 하냐고 물었다. 나는 세 번 다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었고 선배는 쯧쯧 안쓰러운 표정으로 광고계에서 살아남으려면 말싸움에서 지면 안되고, 술과 담배도 잘해야 한다며
너는 아무리 봐도 글렀네
하는 속 맘이 다 들여다 보였다.
세 가지 방법 다 나에게는 다 허망하고 하늘에 걸린 별과 달을 따기 위해 닿지도 않은 어정쩡한 사다리를 놓고서는 하늘만 애달프게 쳐다보는 아이같이 느껴졌다.
그런데…
대학교 3학년 겨울 방학 때 난 두 달 레스토랑 알바를 한 돈을 챙겨 들고 일본 도쿄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그것도 혼자서. 길치 대회라도 있다면 단연 일등을 할 나 때문에 친구들끼리 만나는 장소는 항상 작은 혜영이가 아는 대백 (대구 백화점) 앞에서 만나자였는데…
어학연수 그룹이 먼저 떠난 뒤라 나는 며칠 후 혼자서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낯선 땅, 그것도 바다 건너 물건너에 있는 일본에 홀홀 혼신 혼자 가게 된 것이다. 사실 나중에 후지산에 갔다가 일행과 떨어져 길을 잃긴 했었지만 일본에 처음 도착했을 당시에는 용케 어학원까지 잘 찾아갔다.
도쿄에 두 달 반을 머물면서 쏟아져 나오는 티브이 광고를 보고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니 세상에! 한국 광고에서 보던 광고들이 우수수 그대로 쏟아져 나오는 게 아닌가. 그것도 역대 광고라며 칭송을 받던 광고들까지 알고 보니 일본 광고를 그대로 베낀 거였다.
눈에서는 애국심이 불탔고 창조와 혁명의 띠를 두른 광고 개척자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적어도 내 가슴속에는.
일본에도 난 혼자서 씩씩하게 왔는데 그깟 서울을 못 갈 건 없지!
하고 굳게 마음을 먹고 난 일본에서 국제 전화를 돌렸다. 서울 광고 카피 아카데미로!
그렇게 6개월 코스를 등록을 했는데 다행히 수업은 매주 토요일이었다.
나는 4학년 1학기 동안 6개월을 매주 금요일 밤과 일요일을 서울과 대구를 오갔다.
마침내 대학교 베프인 친구가 대한항공 승무원에 합격해서 서울에서 자취를 하고 있던 터라 수업이 끝나면 친구집에서 자고 일요일에 다시 대구로 돌아왔다. 때론 비행기로, 때론 기차, 그리고 고속버스를 타고 금요일 밤이면 어김없이 서울행에 몸을 실었고 일요일이면 돌아왔다.
서울 광고 카피 아카데미의 원장님이신 카피라이터 이낙운 선생님은 이해인 수녀님의 오빠인데 수업 중에 동생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 얼마나 자랑스러워하시고 예뻐하시는지 전해졌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1세대 카피라이터, 카피라이터 대부이신 이낙운 선생님의 수업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광고는 소비자에게 애인과 팔짱을 꼈을 때의 걸음걸이 같아야 한다는 말씀이셨다. 연인끼리 팔짱을 끼게 되면 상대방이 반보 정도 앞서게 되는데 광고는 너무 앞서가도 안되고 뒤 쳐 저도 안되고 딱 반보만큼만 앞서가야 한다는 것이다. 몇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 말씀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이낙운 선생님의 유명한 카피 중 하나는 바로 써니텐의 “흔들어주세요!”이다.
써니텐의 과즙 원료를 제조하는 과정에서 잔여물이 가라앉지 않아 소비자들이 이물질이라고 불만이 많았는데 이낙운 선생님이 쓴 카피 ‘흔들어 주세요’ 이후로 소비자의 불만이 줄고, 써니텐의 판매가 급격히 증가했다고 한다.
서울 광고 카피 아카데미의 수강생은 거의 카피라이터 지망생 대학생이거나 현직 카피라이터도 있었는데 지방에서 올라오는 사람은 나랑 부산 그리고 광주에서 올라오는 사람 이렇게 세명이었다.
난 6개월 동안 한 번도 결석을 하지 않았고 모두들 대구에서 오는 나도 한 번을 결석 안 하는데 하면서 나 때문에 결석을 못하겠다고 불평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비록 수상은 하지 못했지만 수강생들과 조를 짜서 대학생 광고 공모전에 응모도 했었다. 어떤 제품이었는지 잘 기억은 나지 않는데 원숭이를 모델로 세운 코믹 광고였다. 포트폴리오를 만들기 위해 미대를 다니던 친구의 선배에게 부탁도 했었다.
같은 꿈을 가진 사람들이라 우린 금세 친해졌고 동지애를 키웠고 광고회사에 취직을 하는 친구들은 진심으로 축하를 해줬었다.
선배의 조언대로 난 카피라이터 되는 법 중의 3번을 선택했고, 그리고 정말 거짓말처럼 졸업도 하기 전에 광고 대행사에 카피라이터로 취직을 할 수 있었다. 멀게만, 불가능하게만 보였던 나의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광고대행사 카피라이터라는 직업은 이름처럼 그렇게 멋지지만은 않았다. 엄청난 도전의 연속이었고, 밤샘과 야근은 항상 따라다니는 일상이었고, 주님이신 광고주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때론 비굴해야 했고, 때론 아기를 달래듯 재롱을 떨어야 했고, 싸워야 했고, 이겨야 했다.
나는 어느새 싸움을 잘하는 전쟁터로 던져진 군인이기도, tv 광고에 종종 무상으로 출연하는 엑스트라이기도, 녹음실에서 성우들을 지휘하며 라디오 녹음을 총괄하는 프로듀서이기도 했다.
내가 들어간 광고 대행사는 백운 프로덕션으로 대행사가 프로덕션을 함께 끼고 있어서 제작을 외주를 주지 않고 직접 하는 이점이 있었다.
난 출근 첫날, 경주로 촬영을 가게 되었는데 세상에 내가 광고에 출연을 하게 될 줄은…
#에필로그
서울 광고 카피 아카데미에서 배운 수업 중에 아직도 가슴에 남는 신문 광고가 있는데
쌍용의 기업광고 시리즈를 기획한 김태문 카피라이터가 쓴 쌍용그룹의 기업 PR 광고 ‘도시락 광고’이다.
아래 광고는 1984년 스승의 날에 조선일보, 주간 일간지에 실렸는데 당시 전국의 선생님과 학생들 그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