굵고 때론 가늘었던 나의 직업을 세어보니 대충 20여 가지가 되는 듯하다. 나의 다채로운 직업의 첫 포문을 연 건 엄마의 도움으로 같은 아파트 이웃의 초등학생 딸 작문 과외 선생님이었다. 아마 내가 대학교 2,3학년 때쯤이었던 것 같다.
내가 처음으로 돈을 번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 전국 식생활 개선 수필 공모에서 입선을 한 것이었는데 상금이 무려 30만 원이었다. 솔직히 3만 원이었는지 30만 원이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는데 그 당시에는 상당히 거금이어서 부모님 내복을 사고도 많이 남았던 걸로 기억된다.
사실 그때가 중간고사 기간이었는데 국어선생님이 날 교무실로 부르시더니 식생활 개선 수필을 다음날까지 써오라고 해서 울면서 글을 썼던 게 기억이 난다. 글 내용은 밥상머리마다 어머니의 외할아버지의 밥 한 톨 나오기까지 농부들의 피땀이 담겨있으니 절대로 밥을 남기면 안 된다는 말씀과 절에서 스님들이 공양을 하실 때 밥그릇을 비우고 물까지 부어서 깨끗하게 드신다는 이야기였다. 내 글이 책에도 실렸었는데 안타깝게도 그 책이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가 없다.
아마 그때부터였나 보다. 쓰는 것으로 밥 벌어먹고 살 운명은…
그 당시에 수학, 영어가 아닌 작문 선생님은 흔치 않은 알바였던 것 같다. 현재도 아파트 회장을 하고 계신 수안 좋은 어머니 덕분에 난 쉽게 작문 과외 선생님이 되었고, 그때의 경험덕인지 미국에선 한글학교 선생님이 되기도 했다.
대학교 때 2번째 알바는 대학교 게시판에 붙여져 있는 최고 수입 보장이라는 세차 용품 판매였는데, 귀가 얇은 나는 친구와 찾아갔고 나의 첫 구매 고객은 바로 아빠였다. 아파트를 돌아다니며
“세차해드릴까요?”
하면서 시범을 보여주고 세차 기구를 파는 거였는데, 내 기억엔 아빠가 유일무이한 나의 고객이었다.
세 번째 알바는 새벽 신문 배달이었다. 이 신문 배달 역시 생활력 강하고 저돌적이신 엄마가 구해주신 거였는데 이른 새벽 일어나 아파트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신문 배달을 했는데 난 하루 만에 뻗어버렸다. 나의 신문배달은 일주일이었는지 고작 하루였는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참 이색적인 경력을 안겨준 건 확실하다.
네 번째 알바도 역시 엄마의 주선으로 새벽에 아파트 차를 세차하는 거였는데, 짧은 시간에 꽤 짭짤한 수입을 창출할 수 있는 기회였는데 나의 왜소한 키와 체력, 부족한 끈기로 인해 이 역시 일주일 만에 막을 내렸고 엄마가 대신 남은 3주를 채워서 세차를 하셨던 것 같다.
나의 대학 시절 마지막 알바는 집 근처에 있는 레스토랑 서버였는데 대학교 3학년 겨울 방학 때 일본 어학연수를 가기 위한 자금 조달이 목적이었다. 어학연수 비용의 고작 꼬랑지 정도의 금액을 벌었던 것 같은데 나는 일본 어학연수를 내가 벌어서 갔다고 큰 소리를 쳤던 것 같다.
잡다했던 나의 대학교 알바는 이렇게 막을 내렸고, 대학교 3학년 겨울방학 때 일본에 간 계기로 난 장대한 결심을 하게 된다.
“대한민국의 광고계는 내가 살린다!”
일본에서 본 티브이 광고들을 보고 느낀 건 한국 광고는 일본 광고를 베꼈다. 너무도 많이!!
우연히 잡지를 읽다가 알게 된 카피라이터라는 직업은 내게 너무 매력적으로 다가왔고, 그 당시 드라마에 나온 카피라이터는 워너비, 근사함 그 자체였다. 카피라이터를 꿈꾸던 내가 LG 애드에서 카피라이터를 하고 계신 대학 선배를 만나서 카피라이터가 되는 방법을 듣게 되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