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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Feb 28. 2021

회사를 그만뒀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뭐가 그렇게 두려웠을까?



전 직장을 다니면서 그만두고 싶은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만두지 못한 건, 이 직장을 그만두면 내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취업난이 심각하다.
역대 최대 실업률이다.
기업이 채용인원을 줄인다.
공채가 사라지고 상시채용이 늘고 있다.
1~3년 차 중고 신입이 늘고 있다.



등등 주위에서 들려오는 말만 들어도 취업을 하고 이직을 하는 건 너무나 높은 벽 같았다. 특히 제대로 공채를 준비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나라 취업 시장에 아주 겁을 먹고 있었다. 스스로를 낮게 평가하고 있으니 다른 곳에 갈 자신이 없던 것이다.


그렇게 두려워하던 퇴사를 한 지 6개월이 지났다. 이직처를 알아보거나 뒷 일을 생각하고 퇴사한 것이 아니었다. 이대로 이 회사에 계속 다닌다면 내가 망가질 것 같았다. 그동안 일주일에 3~4번은 하루 15시간씩 매일 같이 야근을 하고 주말에도 일을 하고 거기에 너무나 빠르게 바뀌는 내부 상황들... 일이 많은 건 참을 수 있었다. 이미 3년 동안 많은 일을 하면서 회사를 다녔고 힘들었지만 좋아하는 일이었다. 잘하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그만두기에는 그동안 해왔던 일들이 너무 아깝기도 했다.


그런 내가 퇴사를 결정하게 된 계기는 결국 '사람' 때문이었다. 회사에서의 나는 그동안 살아온 '나'가 아니었다. 싫어하는 것을 억지로 하면서도 좋아서 하는 일이다,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믿음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토록 믿던 상사였는데 정말 교묘하게 나를 속이고 있던 것을 알게 되었다. 한번 깨닫고 나니 그 사람의 가식적인 모습, 비정상적인 요구, 제멋대로 하는 업무 지시 등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명확한 가이드라인 없이 던지는 일들을 하다가 내가 못하거나 실수하는 일이 생기면 그건 다 내 잘못이 되었다. 가스 라이팅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몇 년간 모든 잘못은 내 탓이라고 생각했다.

매번 실수하고 일도 제대로 못하는 나는 왜 이럴까.

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일까...

3년간 이 문제로 고생했고 자존감이 매우 낮아졌다.

우울증이 오고 살이 급격히 빠지는 등 신체적으로도 변화가 생겼다.


나를 지켜보던 사람이 질문을 던졌다.

"도대체 네가 못한 게 뭔데?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어?"


순간 말문이 막혔다. 객관적인 상황을 봤을 때, 딱히 못한 것은 없었다. 몇 년째 매출은 상승하고 있었고 업무를 펑크 내거나 회사가 뒤집어질 정도로 큰 사고를 친 적도 없었다. 힘든 것은 사실이었지만 회사에서는 성실하고 열심히 하는 직원으로 평가받고 있었다.


이렇게 힘든 것은 내가 잘못했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회사의 잘못이고 상사의 잘못이다.

무턱대고 남의 탓을 하는 것이 아니다.

더 이상 열심히 할 수 없는 상황에서 힘들어진다는 것은 내 잘못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을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다시는 남에게 휘둘리지 않도록 나를 단단하게 만들고 싶다. 열심히 하고 있는데도 일과 회사가 힘들다면 그건 나의 잘못이 아니다. 생각보다 퇴사는 별 일이 아니다. 퇴사를 한다고 하루아침에 길바닥에 나앉지도 나의 가치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저 내가 회사가 아니면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얼마 전 채용공고가 올라온 걸 보고 지원서를 작성하다가 그만뒀다. 처음에는 의욕 넘치게 달려들었으나 짧은 공고 기간과 그동안 취업을 위해 준비한 것이 없으니 예상보다 쉽지 않았다. 기한 내 자소서를 쓰고 경력기술서를 쓸 수는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게 맞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대로 지원서를 내면 떨어질 수도 있지만 붙을 수도 있다. 붙을 가능성도 높은 포지션이었다. 그러나 붙는다면 전에 다니던 것과 어떤 차이가 있는 건가. 또다시 면접을 위해 알맹이가 빈 채로 그저 듣기 좋은 말을 만들어내며 면접을 보고 운이 좋으면 붙어서 회사를 다닐 것이다. 그리고 업무에 치이고 사람에 치이고 나의 업무적 역량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면서 그저 들어오는 일을 처리하기만 하고 똑같은 고민을 하게 되겠지.


아직 배가 덜 고픈 걸 수도, 현실을 모르는 걸 수도 있다. 그러나 다음 직장을 위해, 그 보다 더 오랫동안 회사를 다니고 평생 동안 일을 할 나를 위한 원동력을 길러야 한다. 사실 일이란 뭐든지 할 수 있다. 다만, 그 일을 하는 나의 태도나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느리지만 천천히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매주 나의 실망스러운 모습을 마주하지만 그대로 인정하고 다시 기회를 주고 그런 나의 모습을 받아들이려 하고 있다.


그렇게 두려워하던 퇴사를 하고 시간이 지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시 취업을 못할 것이라는 불안감도 없다. 나에게는 훌륭한 자원이 있다 그것을 좀 더 갈고닦아서 밖으로 드러내고 사용하는 법만 배우면 된다. 현실의 조급함에 휩쓸려 무작정 일을 하지 말자. 지금 집중할 게 무엇인지 기억하고 불필요한 일들을 모두 치워버리자. 두려웠던 것은 퇴사가 아니었다.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일을 했는데도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나의 무능력함이 두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막상 퇴사를 하고 나니 생각보다 무능력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일을 했던 이유와 그 의미를 찾아 그저 주어진 일이라 했던 것이 아닌 내 의지가 담겼던 일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더 이상 휩쓸리고 싶지 않다.

단단한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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