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는다는 것은 곧
새로이 태어난다는 것

- 한태숙 연출, <세일즈맨의 죽음>

by 달밍


(2017년 4월 12일부터 4월 30일까지, 예술의 전당 CJ 토월극장에서 공연된 한태숙 연출의 <세일즈맨의 죽음> 리뷰입니다.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런 말을 꺼내 놓기에는 조금 부끄럽지만, 그래도 솔직하게 시작해보자. 나는 지금까지 제대로 된 연극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연극이 나를 단숨에 매료시킬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이토록 세밀한 감정을 그려내고, 그렇게 그려놓은 감정을 폭발시키고, 그래서 나를 전율하게끔 하는 그런 연극을 보게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나의 머릿속에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려면 무언가 눈에 띄게 화려한 것이 필요하다는 믿음이 굳건히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데 호화롭게 눈길을 사로잡는 것이 없어도, 아주 절제되고 기본에 충실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 속에는 사람들을 전율시키는 힘이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갖가지 양념과 조미료로 맛을 낸 시끌벅적한 음악보다, 때로는 어딘가 부족한 듯한 기타 소리 위에 펼쳐지는 잔잔한 목소리만으로도 우리는 울어버릴 때가 있다는 것을. 그런 간단한 삶의 이치를 나는 이 연극 속에서 다시 한 번 발견할 수 있었다.


한태숙 연출의 <세일즈맨의 죽음>은 나무로 된 뼈대가 앙상하게 다 드러난 집 한 채. 그리고 그 집을 무너뜨릴 것만 같이 위태로워 보이는 나무 한 그루를 배경으로 한다. 극의 내용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며 전체적인 분위기를 잡아주는 이 절제된 공간 안에서 인물들은 힘 있게 이야기를 그려 나간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평생을 세일즈맨으로 몸 바쳐 일 해온 윌리 로먼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윌리는 19살 때부터 세일즈에 몸담아 34년을 오롯이 회사에 바쳐왔다. 하지만 젊었을 적의 반짝임도 잠시, 그에게는 ‘늙은 개처럼 무덤 속에 굴러 떨어질 일’만 남아있는 듯하다. 열심히 차를 몰아 물건을 홍보해봤자 120달러 남짓한 생활비도 제대로 마련할 수 없는 처지의 윌리. 그는 150달러 '밖에' 하지 않는 녹음기를 자랑하는 어린 사장 앞에서 처참하게 뭉개지고야 만다.


이내 사형선고와도 같은 해고 소식을 듣게 된 윌리는 이 어린 사장 앞에서 바닥까지 떨어져버린 스스로를 비굴하게 내보인다. 다시 일하게 해 달라고, 그 어떤 먼 곳이라도 다녀오겠다고. 무릎을 꿇은 채 소리쳐보았지만 그마저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결국 만신창이가 된 그에게 오랜 친구가 일자리를 하나 제안하기에 이른다. 참, 그깟 알량한 자존심이 뭐라고. 일자리를 간절히 원하면서도 이제껏 무시해오던 친구가 내어준 일자리는 죽어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윌리는 그런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작고 초라해 보였을까. 그의 상황을 보며 자연스럽게 우리 할아버지의 모습이 겹쳐졌다. 내가 중학생이었을 무렵, 할아버지께서는 갑작스레 바뀐 법으로 인해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한 채 정년퇴직을 맞이하셨다. 그런 할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기에 나는 너무도 어렸고, 그래서 그 외롭고 아픈 뒷모습을 차마 안아드리지 못했었다. 그때에 느꼈던 쓸쓸한 공기와 무거운 침묵이 선연히 떠올라 가슴속 한 구석이 참 아려왔다.


그런데 윌리의 무너짐 못지않게 나의 마음을 가득 채웠던 것은 바로 장남 비프의 이야기였다. 비프는 어렸을 때부터 촉망받는 풋볼선수로 명문 대학에 입학을 앞둔 유망주였다. 찬란한 앞날만을 기다리던 비프가 돌연 문제아의 길을 걷게 된 것은 바로 아버지의 외도를 목격한 순간부터이다. 스타킹을 꿰매어 신는 어머니를 홀로 두고, ‘새 스타킹은 언제든지 환영’이라는 낯선 여자에게 매일같이 스타킹을 선물하던 아버지. 그의 불륜 현장을 목격하게 된 비프는 실의에 빠져 곧장 대학 이름을 적어 두었던 소중한 운동화를 불태우고 결국 미래를 포기하기에 이른다. 그 뒤로부터 비프의 삶은 진흙탕을 걷는 것만 같다. 이루지 못하게 된 꿈을 대신해 줄 무언가를 찾기라도 하듯 비프는 도둑질을 일삼고, 결국 그가 당당히 두발 딛고 설 자리도 점점 사라져만 가는 것이다. 내가 세상의 주인공처럼 느껴지기만 하던 날들을 뒤로하고, 참으로 매정한 현실을 온몸으로 마주한다. 그리고 우리의 비프는 그런 현실 속에서 빛바랜 과거를 잊지 못해 자꾸만 허덕인다.


동시에 윌리는 그러한 비프에게 자신의 죄책감과 성취욕을 미성숙한 방식으로 투사하며 두 사람의 사이를 자꾸만 병들게 한다. “난 싸구려 인생이 아냐! 나는 윌리 로먼이야! 너는 비프 로먼이고!” 울분이 섞인 그의 외로운 절규는 망가질 대로 망가진 이들의 삶을 더욱 처절하게 만들 뿐이다. 그렇게 문드러져버린 관계 속에서 윌리는 차츰 환영을 보며 미쳐간다. 자동차를 운전하다가도 스스로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잊어버려 사고를 내기도 하고, 과거의 빛나던 기억을 환영처럼 보고, 또 죽은 이의 환청을 들으며 그 속에서 허우적대기도 한다. 1부의 마지막,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던 세 벽면이 서서히 다가오며 마치 집을 포위하고 있는 듯한 고층 건물의 모습으로 바뀌는 장면이 고조된 인물들의 심리적 갈등을 효과적으로 잘 그려내고 있었다.


서로를 마음껏 사랑할 수도, 그렇다고 미워할 수도 없는 두 사람. 날이 갈수록 미쳐가는 윌리를 바라보는 비프의 마음도 쓰라리기는 마찬가지이다. 마침내 아버지 윌리는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내리고야 만다. 가족은 무너져 내렸고 세계는 온통 검은색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우리의 비프는 차가운 현실에 눈 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현실에 힘껏 부딪치기로 결정한다. 그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묵묵히 짊어진 채 맹렬히 반항하기를 선택한다. 신탁에 맞서 존재의 본질을 헤집어 내려갔던 오이디푸스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산꼭대기로 돌을 밀어 올리는 시지프스처럼, 그리고 오지 않는 고도를 늘 처음과 같은 마음으로 기다리는 블라디미르처럼.


“왜 원하지도 않는 사람이 되려고 이 난리를 치고 있는 거야? (…) 내가 원하는 건 저 밖으로 나가 내가 누군지 알게 되는 그때를 기다리는 건데!”라고 울부짖던 비프의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히 울린다. 그는 끝내 스스로가 지금껏 되고 싶지도 않은 것이 되기 위해 발버둥 쳐왔다는 사실을, 그리고 앞으로는 내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힘겹게 발견하게 되었다. 그렇기에 비프의 삶은 결코 절망적이지 않다. 막이 내린 후 이어질 그의 삶은 분명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일 테니까. 그것이 부조리하고 모순 덩어리인 운명을 담대히 받아들인 자에게 주어지는 신의 구원이자 축복이니까.


이런 점에서 나에게 <세일즈맨의 죽음>은 평생을 불행하게 직장에 몸 바친 직장인을 향한 위로라기보다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를 치밀하게 탐색하며 성장해 나가는 청년의 모습을 생생히 그려낸 작품으로 다가왔다. ‘25년 주택 할부금을 다 갚았는데, 그 집에 머물 사람이 아무도 없게’된 시리도록 냉담한 현실. 그 속에서 푸르게 빛나고 반짝이는 청춘(靑春)이 아니라, 씁쓸하게 상처받은 청춘의 얼굴들. 다시 말해 나와 너, 그리고 우리의 얼굴을 대변하는 비프가 부서질 듯 위태로운 길을 걸으면서 스스로를 찾기 위해 펼치는 그 모든 분투. 끝끝내 삶을 살아내기 위하여 싸우고 울고 괴로워하는 우리의 발자욱 한 걸음 한 걸음이 극 속에 고스란히 펼쳐져 있었다. 죽는다는 것은 곧 새로이 태어난다는 것이기에, 우리의 앞날은 결코 비극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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