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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밍 Jan 09. 2018

오후 두시에 올라 해가 질 때 내려왔다

패터슨 시의 패터슨 씨



미끄러운 계단을 하나씩 오르면 다시
계단이 나타나는 차가운 손잡이를 붙들고
바닥이 내려다보이는 계단의 틈
사이를 애써 외면한 채
천천히
계단을 오른다

파란색이었다가 붉은색이었다가 마침내 보랏빛을 띠는 일곱 개의 스탬프가 찍혀 있는 작은 쿠폰을 내미는 나를 보는 여자는 익숙한 듯 스탬프를 찍어 돌려준다

영화는 광고 없이 시작한다
영화관에는 남자 하나 여자 셋 다시 여자 둘
일곱 명의 관객을 앉히고서 광고가 없는 영화는 빛을 비춘다

패터슨 시에 사는 버스 기사 패터슨 씨는
시를 쓴다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 토요일
시를 쓴다
알람도 없이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눈을 뜨는 패터슨 씨는 오래 안고 있던 아내의 옆자리에서 빠져나와 누군가 버스의 창을 똑똑- 두드릴 때까지 계속해서 시를 쓴다 같은 자리에서 같은 자세와 같은 표정으로 같을 수는 없는 시를 쓴다

패터슨 씨가 시를 쓰는 동안 내 옆 옆자리, 그러니까 G 열의 9번 혹은 G 열의 5번에 앉아있던 여자는 잠에 빠져든다 스마트폰이 없는 패터슨 씨가 빈 종이에 낱말들을 적어 내려가는 동안 내 앞 옆 옆자리, 그러니까 F 열의 9번 혹은 F 열의 5번에 앉아있던 남자는 밝은 화면의 스마트폰을 오래 쳐다본다
패터슨 씨는 시를 쓰고 여자는 잠을 자고 남자는 손안을 응시하고
나는 상영관이 하나뿐인 영화관의 스크린 속 패터슨 씨와 좌석 속 사람들을 바라본다 상영관은 하나뿐인데 스크린은 하나이다가, 두 개이다가, 또 하나이다가 패터슨 씨가 아내와 손을 잡고 영화를 보러 가자 스크린은 하나이다가 두 개이다가 세 개가 된다 스크린을 보는 나와 스크린 속에서 나를 바라보는 패터슨 씨 우리는 서로를 보고 있었다

시를 잃어버린 시인은 어디로 가나 영화가 막을 내리면 텅 빈 영화관에 홀로 남은 나는 어디로 발걸음을 옮기나

창문 밖으로 하얀 눈송이가 떨어지면
나는 계단으로 가지 않고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내 가방에는 종이는 있지만 텅 빈 종이는 없었고
나에게는 시집이 있으나 나는 시를 적지는 않고
나의 몸은 빠르게 떨어지는데 패터슨 시의 패터슨 씨는 돌아오는 월요일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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