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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코치 Oct 14. 2021

왼손필사

제주에서의 왼손필사

2019년 가을, 내게 일어난 엄청난 일에 난 제정신이 아닌, 그야말로 미친 상태였다. 문득 그때를 돌이켜보니 과연 내 인생에 그때만큼 힘든 일이 또 생기나, 싶을 정도다. 태어나서 그렇게나 울어본 적이 있었을까. 도망갈 수밖에 없었기에 회사를 관두고 모든 것을 뒤로한 채 제주로 떠났다.


첫 번째 한달살이를 하며 많은 것을 보고 느끼며 꽤 많은 회복을 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서울로 돌아온 나를 위로할 겸 친구가 시간 내어 함께 사이판 여행을 가주었다. 여행 중엔 행복했지만 다시 서울로 돌아와서는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아직은 일상으로 돌아가긴 어려울 것 같아 다시 제주로 갈 준비를 했다.


가을에 한 달 동안 제주에서 지내며 여행은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기에 이번엔 좀 더 특별한 것을 해보고 싶었다. 문득 왼손으로 필사를 하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어떤 책을 필사하면 좋을까 고민하다 눈에 띈 김준 작가님의 <견뎌야 하는 단어들에 대하여>라는 책을 골라 캐리어에 담았다. 서울로 다시 돌아오기 전에 이 책의 왼손필사를 마치겠다는 목표를 가졌다.


일주일 정도 서귀포 쪽을 떠돌며 여행했다. 녹초가 될 정도로 많이 걸었던 것 같다. 12월의 제주는 크게 춥지 않아 걷기 좋았고 아름다운 풍경도 즐길 수 있었다.


걸으면서 만날 수 있었던 아름다운 제주 남쪽 풍경


첫 필사는 서귀포 시내에 있는 어느 게스트하우스에서 시작했다. 오른손잡이라서 왼손을 거의 쓰지 않는데 왼손으로 글씨를 쓴다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인 줄 몰랐다. 글씨 쓰는 게 이렇게나 힘이 많이 들어가는구나. 새삼 놀랐다. 첫날은 알아보게 쓰는 것조차 어려웠다. 이 손이 과연 내 손이 맞나 싶을 정도로 뜻대로 되지 않았다.


2019. 12. 16 처음으로 왼손필사를 시작한 날 / 제주 서귀포시 어느 게스트하우스

첫날의 필사를 마치고 '과연 내일도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한 글자 한 글자 적는데 왜 이리 시간이 오래 걸리던지. 오른손으로 쓰면 5분이면 끝날 것 같은데 한 페이지를 거의 1시간은 쓰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가져온 책 한 권은 다 옮겨적고 싶다는 마음으로 여행을 마치고 하루를 마무리할 때마다 조금씩 왼손필사를 이어나갔다. 사흘쯤 하다 보니 뭔가 알 수 없는 매력이 느껴져 꽤 오랜 시간 몰두하며 글을 옮겨 적고 있었다.






많은 짐을 들고 숙소지를 옮겨 다니는 게 버거워 게스트하우스 스탭으로 한 달 살 곳을 구하기 시작했다. 겨울 방학 시즌이었기에 학생들이 제주살이 스탭을 많이 지원해서 경쟁률이 제법 있었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떨어지기도 했다. 그래도 여러 번 지원하니 한 곳에서 불러주어 제주 서쪽 한경면에서 한 달간 스탭으로 일하며 살게 되었다.


내가 일한 게스트하우스는 사장님의 사정으로 임시휴업과 다름없는 상태였다. 적극적 운영이 어려우셨던 사장님은 마케팅을 중단하고 오는 손님만 받으셨는데 겨울이라서 더욱 손님이 없기도 했다. 그래서 스탭으로 일하면서도 비교적 한가했고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2019. 12. 23 왼손필사 일주일째 / 제주 한경면 어느 게스트하우스


일하게 된 게스트하우스는 근처에 식당도, 편의점도 없는 정말 조용한 곳이었다. 이곳에 와서 한동안은 외출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동안은 제주에 있더라도 사람 북적한 곳에서 주로 있었는데, 이곳은 하루에 한 사람을 구경 못할 때도 있었다. 혼자가 된 것이 익숙지 않아 침대에서 울었던 적도 있다. 어쨌든 이러한 환경이 왼손필사에 몰두할 수 있게끔 만들어주긴 했다.


일주일 정도 많은 시간을 들여 써보니 처음보단 꽤 글씨다운 글씨가 나오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글자크기들이 서로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 보기 좋았다.


2020. 1. 6 왼손필사 3주 째 / 제주 북쪽 '카페 도두'

왼손필사는 숙소에서 가장 많이 했지만 카페에서 할 때도 많았다. 노트, 펜, 테이블 그리고 옮겨적고자 하는 글만 있다면 어디서든 왼손필사가 가능했다. 서울에서 태어나 바쁘고 빠르게 살아온 나에겐 이렇게 의도적으로 느린 시간을 보낸 건 이때가 처음이었을지도 모른다. 3주쯤 되었어도 여전히 왼손 글씨 쓰기는 힘들었지만 점점 왼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지며 익숙해졌다. 어느덧 목표한 책 한 권 왼손필사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남은 페이지가 알려줬다.


2020. 1. 13  4주 만에 목표한 책 한 권 왼손필사 마무리 / 제주 애월 스타벅스


많은 시간을 투자했기에 4주 만에 목표한 책 한 권 왼손필사를 마칠 수 있었다. 4주 동안 했어도 왼손 글씨 쓰기는 힘들고 느렸지만 점점 좋아지는 게 눈에 보이고 완성물을 보며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다. 목표치를 달성했지만 계속해서 이 활동을 이어나가고 싶었다. 그래서 이후에는 좋은 시, 노래 가사, 글귀를 찾아서 매일매일 왼손필사를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어느 날 왼손필사 할 글을 찾다가 이해인 수녀님의 <12월의 시>라는 시를 알게 되어 필사했다. 시의 내용이 너무 감동적이고 서울로 돌아갈 나에게 필요하면서 와닿는 내용이었기에 좀 더 가슴에 담고 싶었다. 문득 내가 제주에 오기 전 나를 위로해주던 분들이 떠올랐고 그분들께 왼손으로 <12월의 시>를 써서 전해드리고 싶었다. 편지지를 구입해 고마운 분들 다섯 분께 진심을 담아 꾹꾹 눌러썼다.


이해인 수녀님의 <12월의 시>
한 달간 스탭으로 지냈던 한경면의 게스트하우스



"가라 옛날이여"

"오라 새 날이여"

나를 키우는 모두가 필요한

고마운 시간들이여


나를 죽고 싶게 만들었던 그 사건 또한 나를 키우는 고마운 시간이었음을 말해주는 것 같은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은 이제 서울로 돌아가도 괜찮을 것임을 알려주는 것만 같았다. 나의 새로운 날을 기대하며 제주에 왔을 때보다 한결 마음 편하게 서울로 돌아갈 수 있었다.







"왜 나는 이렇게 매번 힘들기만 한 걸까."

라는 생각으로 평생을 살았는데 결국 나에게 감사의 마음이 부족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나만 억울하게 당한 것 같았던 일들도 나 또한 잘못이 있었음을. 그리고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던 경험도 결국 나를 성장시키고 갇혀있던 우물 밖으로 나와 더 넓은 세상을 보게 해 준 고마운 시간들이었다.


제주살이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와서도 1년이 넘도록 마음의 상처가 완전히 치유된 건 아니었다. 그래도 나를 온전히 품어주었던 제주와 그곳에서 몰두할 수 있었던 왼손필사 덕분에 어느 정도의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 같다. 


서울에 돌아와서도 매일 왼손필사를 하며 의도적으로 나에게 느린 시간을 주었다. 작년엔 3권의 책을 필사했고, 올해는 필사가 아닌 왼손 일기를 3줄 정도 매일 쓰고 있다. 아직도 왼손 글씨는 오른손 글씨처럼 빠르지 않고 예쁘지도 않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조금씩이라도 매일 써보려고 한다.


약했던 왼손이 조금씩 강해지는 만큼, 나 또한 조금씩 강해질 거라고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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