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움받을 용기> 첫 번째 밤 - 트라우마를 부정하라
철학자 : 아들러 심리학은 트라우마를 명백히 부정하네. 이런 면에서 굉장히 새롭고 획기적이지. 분명 프로이트의 트라우마 이론은 흥미진진한 데가 있어. 마음의 상처(트라우마)가 현재의 불행을 일으킨다고 생각하지. 인생을 거대한 '이야기'라고 봤을 때, 그 이해하기 쉬운 인과 법칙과 드라마틱한 전개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는 매력이 있어. 하지만 아들러는 트라우마 이론을 부정하며 이렇게 말했네. "어떠한 경험도 그 자체는 성공의 원인도 실패의 원인도 아니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받은 충격 -즉 트라우마-으로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 경험 안에서 목적에 맞는 수단을 찾아낸다. 경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 부여한 의미에 따라 자신을 결정하는 것이다"라고.
- 미움받을 용기 중에서 -
'트라우마'라는 용어를 알게 된 이후부터 내가 가진 수많은 트라우마를 발견하게 되었고 '나의 트라우마로 인해 영원히 고통받을 것이다.'라고 단정 지으며 살아왔다. 내 인생에 트라우마로 자리 잡아 오랜 시간을 괴롭혔던 것 중 하나는 아버지와의 경험이다.
중학교 1학년 때까진 그럭저럭 학교 공부에 충실하는 편이었다. 전과목 평균이 85점 정도였다. 그러나 2학년이 된 후 온라인게임에 빠져 공부를 덜 하게 되었고 평균이 75점까지 떨어졌다. 75점이면 못하지 않는 거고 성적이야 다시 올리면 그만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평소 내 성적에 관심 없어 보이던 아버지가 75점의 성적표를 보더니 불 같이 화를 내시며 자신이 운영하는 회사에 성적표를 붙여두셨다. 수치심을 느낀 나는 이후로 학교 공부에 손을 떼고 더욱더 온라인 세계에만 파고들었다. 3학년 때 성적은 50점대로 떨어졌고 고2 때까지 공부를 거의 하지 않았다.
이 당시 누구도 나에게 공부를 하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다. 아버지와의 일화 속에서도 아버지가 공부하지 말라고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공부를 멈추었다. 아버지의 행동에 '마음의 상처'를 받았고 그 상처로 인해 '공부의 의미'를 잃어버린 것이다. 결국, 사건은 나로 인해 발생하지 않았을지라도 이후 '공부를 안 한다'라는 행동은 내가 결정한 것이다.
결국 이 트라우마는 애초에 학업 욕구가 있었던 나였기에 고3 때부턴 다시 공부를 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극복되었다. 그러나 3년 넘게 다른 친구들처럼 공부하지 않았기에 따라가는 게 쉽지 않았고 수능 결과는 참담했다.
이 일화가 있고 10년이 지나 아버지에게 성적표 사건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 사건으로 인해 내가 공부에 손을 놨었다고. 아버지는 자신이 했던 행동을 기억조차 하지 못했다.
이 후로도 인생의 큰 사건을 겪을 때마다 내 안의 트라우마를 만들며 나의 행동을 거부한 적이 많다. 트라우마(원인)로 인해 현재 내가 겪는 아픔은 당연한 것이고 그 아픔은 평생 가져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단 한 번도 트라우마를 부정하지 않고 살았기에 '트라우마를 부정'하는 아들러 심리학을 알게 되고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지금 나에겐 어떠한 트라우마도 없다. 가끔씩 과거의 상처가 떠오르면 쓰라리긴 하지만 그때 잠시 뿐이다. 트라우마에 사로잡혀 계속적으로 괴로워하고 계속해서 못한다는 핑계를 대는 나 자신이 이제는 싫어지기도 했어서 더욱더 극복하려고 노력했다. 나에게 트라우마가 없는 것은 아들러 심리학을 실천하고 살아가는 결과물 중 하나이다.
트라우마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극복이라는 표현을 쓰는 게 맞는 건가 라는 생각도 든다. 나는 '트라우마를 부정'까진 하지 않는다. 트라우마는 충분히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노력에 따라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트라우마라고 여겨질 정도로 자신을 괴롭히는 상처가 있다면 극복을 위해 노력해야만 트라우마로 인해 발생하는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을 수 있다.
내가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 것들은 다음과 같다.
1. 그 경험이 나에게 성장의 발판이라고 생각한다.
큰 상처를 받았겠지만 분명 배울 점이 있었을 것이다. 적어도 '저런 상처 주는 말과 행동을 해서는 안되는구나.'라는 것은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나 또한 타인에게 트라우마가 될 만한 상처를 안겨준 적이 없을지 되돌아보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이 자신의 단점을 개선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는 성장으로 이어진다.
2. 환경을 바꾼다.
나에게 큰 상처를 준 사람이나 환경을 계속적으로 곁에 두지 않는다. 일종의 도망이기 때문에 아주 좋은 방법이라 할 순 없지만 그 사람과 환경을 계속적으로 곁에 두며 상처를 떨쳐내는 것은 환경을 바꾸는 방법보다 더 어려운 일일 수도 있다. 계속되는 상처가 나를 정체시키고 그 상처로 인해 다른 상처까지 생길 수도 있으니 좀 더 나은 사람들과 좀 더 나은 환경인 곳으로 나를 옮기는 방법을 택했다. '도망'과 '회피'라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가장 효과가 좋은 극복 방안이었다.
3. 가만히 들여다 보고, 받아들인다.
나의 트라우마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필요하다면 트라우마와 대화를 시도한다.
내가 왜 이런 트라우마를 갖게 되었을까.
내가 이 트라우마를 곁에 두고자 하는 것은 나의 의지인가, 타인의 영향인가.
이 트라우마를 마주할 때마다 어떠한 감정이 느껴지는가.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은 명상에서 자주 사용하는 방법이다. 트라우마를 내가 먼저 나서서 그 트라우마를 직시하고 가만히 들여다보자. 그리고 내가 왜 이런 트라우마를 떨쳐내지 못하는지 계속해서 질문을 해보자. 의도해서 트라우마를 직접 마주하고 가만히 들여다볼 때와, 의도치 않게 불현듯 트라우마로 인해 괴로움을 느낄 때 차이가 명확히 느껴질 것이다. 가만히 들여다보며 트라우마와 마주했다면 그 트라우마를 내 것으로 받아들여보자.
한 지인이 해외여행을 하다 바다에서 큰 사고를 당해 목숨을 잃을 뻔한 적이 있는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 일이 있고 마음뿐만 아니라 신체에서도 툭하면 열이 오르고 몸이 떨리는 증상이 발생했다고 한다. 병원에서도 병명을 알 수 없어 치료가 어렵다고 했다. 그럼에도 수년간 기약 없는 병원 치료를 받다가 결국 그 증상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열이 오르고 몸이 떨릴 때마다 "또 왔구나."라며 반갑게 맞이하고 그 상황을 즐겼다고 한다. 이 방법을 계속 시도한 끝에 현재는 증상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고 했다.
4. 타인의 트라우마를 들여다본다.
타인이 말하는 트라우마를 들어보면 이해가 될 때도 있고 이해가 되지 않을 때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듣다 보면 '나라면 이렇게 극복할 텐데?'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한 공감과 해결책을 찾는 과정은 내가 가진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예전 회사에서 '모니터를 옮기다가 떨어뜨려서 망가뜨린 경험'을 가진 직원이 있었다. 그 직원은 자리 배치를 바꾸거나 회사에서 이사를 해야 할 상황마다 그 이야기를 했다. 자신은 그 경험으로 인해 모니터를 옮길 수 없는 트라우마를 가졌다고 말했다. 나는 트라우마를 핑계로 이러한 일에 타인의 도움을 받는 그 직원이 그렇게 좋아 보이진 않았다. 이렇게 타인의 트라우마가 좋지 않게 보인다는 것은 나의 트라우마를 누군가에게 말할 때 타인이 그렇게 느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타인을 위해 내 트라우마를 극복하라는 것은 아니다. 모니터 정도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옮길 수도 있다. 그런데 모니터를 옮겨야 하는 상황이 올 때마다 사람들에게 '나의 트라우마'를 이야기해야 하는 것은 오히려 스스로에게 불편한 일이 아닐까?
5. 트라우마가 없었다면 할 수 있었던 일을 해본다.
모니터를 옮기다가 떨어뜨릴 것 같아도 일단 옮겨본다. 혼자 옮기기 두렵다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함께 옮겨보고 그 후에는 타인을 돕기도 하고 혼자서도 옮겨보자. 또다시 모니터를 떨어뜨린다면? 괜찮다. 그저 실수일 뿐이다. 실수는 누구나 한다. 그 실수로 당신을 질책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사람보다 모니터를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그 사람은 당신에게 비난을 함으로써 스스로가 모니터보다 못한 사람임을 증명하는 것이므로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당신은 어떤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가? 위에서 말한 성적표 사건이나 모니터에 대한 트라우마는 어찌 보면 당신이 가진 트라우마에 비해 매우 가벼운 트라우마일 것이다. 외상이 큰 트라우마일수록 떨쳐내는 데 시간과 노력이 더 많이 들 것이다. 개개인에게 트라우마는 씻을 수 없는 상처인 경우가 많다. 그 아픔의 길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나 또한 글로 쓰기 어려울 정도의 트라우마를 경험했고 꽤 오랜 시간을 마음속에 지니며 스스로를 괴롭히곤 했다. 다만, 그 트라우마에 사로 잡혀 평생을 괴롭지 않기 위해서 떨쳐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을 뿐이다. 그리고 이 노력은 힘든 과정이었지만 분명 가치가 있었다.
트라우마를 지니고 사는 것으로 인해 가장 괴로운 건 자기 자신이다. 나의 트라우마는 결국 타인이 듣기엔 핑계일 뿐이다. 공감을 해주는 사람조차도 그 끝엔 결국 핑계라고 생각한다.
남들이 핑계로 밖에 치부하지 않는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했으면 좋겠다. 트라우마가 당신을 좀 더 평화롭게 성장하는 데 방해하고 정체시키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한다. 또한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않는 것은 결국 우울증의 수많은 원인 중 하나를 보유하고 사는 것과 같다. 나는 트라우마를 가진 당신이 그 트라우마로 인해 괴롭고 아프고 정체되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