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영어 이름(닉네임) 부르는 회사
직위로 불리던 불편함에서 탈출한 기분!
* 글에 나오는 이름들은 전부 가명입니다.
수평적 조직 문화, 영어 이름(닉네임) 사용!
요새는 수많은 스타트업에서 직급을 없애고 동료를 편하게 부르는 곳이 많다. '수평적 조직 문화, 영어 이름 사용'이라는 말은 이런 스타트업의 채용공고나 조직문화를 소개하는 내부 마케팅(자사 블로그, 채용페이지, 보도자료 등)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직급을 없앤다는 것은 곧 수평적 문화와 소통을 위함이다. 수많은 회사에서 오랫동안 사용해오던 직위는 결국 그 직원의 '급(Level)'이기 때문에 수직구조가 될 수밖에 없다. 물론 스타트업에서도 주니어, 시니어, 각종 숫자 등 Level을 사용하긴 하지만, 김대리님, 박과장님 같은 성 뒤에 직위를 붙여 부르는 것을 없앤 곳이 많다. 이렇게 직급을 없애면 결정권은 직책자에게 있긴 하지만 상명하복이 깨지다 보니 좀 더 자유롭게 의견을 낼 수 있다.
스타트업마다 다르지만
1. 여전히 전통적인 직위(부장, 차장, 과장, 대리, 주임 등 일본식 직위 또는 수석, 책임, 선임, 전임 같은 연구원 직위) 체계를 가진 곳도 있고
2. 준호님, 수연님처럼 본명에 '님'을 붙이는 곳도 있고
3. 제니님, 헨리님처럼 영어 이름(닉네임)에 '님'을 붙여 부르는 곳도 있고
4. 우리 회사처럼 영어 이름(닉네임)을 제니~, 헨리~라고 자연스럽게(?) 부르는 곳도 있다.
대학을 막 졸업한 신입직원도 대표님, 이사님들에게 이렇게 영어 이름'만' 부른다. 처음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제니, 헨리, 이런 식으로 부르는 게 꽤나 신선하긴 했다. 진짜 이렇게만 보면 수평적인 느낌은 확실히 난다. 대표님에게 '대표님'이 아닌 "헨리, XX사와의 계약서 검토 부탁드려요."이런 식으로 말한다.
나는 이런 느낌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는지 그동안의 경력이 전부 직급 회사였음에도 불구하고 금세 적응했다. 구성원의 타이틀, 직책, 연차 등에 상관없이 대표이사부터 막내 직원(사실 막내 직원이라는 개념도 없다.)까지 모두가 서로를 제니~ 헨리~라고 이름만 부른다.
내가 이런 느낌을 마음에 쏙 들어했던 이유는 내가 가진 두 가지 특성 때문인데 첫째로, '사람 간의 위, 아래'에 거부감이 상당하고 두 번째로 직장에서 '직위'로 불리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효를 중시하는 우리나라에서는 부모는 자식보다 윗사람이다. 물론 대다수의 다른 나라에서도 그러하긴 하다. 또한 나이를 통해 언니, 오빠, 동생으로 서로를 구분하고 위아래를 정한다. 그래서 직장 연차가 높은 선배가 후배보다 나이가 어릴 경우 선배 쪽이 꽤나 당혹스러워하고 불편해한다. 나 또한 이러한 문화 속에서 평생을 살아왔기 때문에 이러한 '사람 간의 위, 아래'에 거부감이 있다는 것을 잘 모르고 잘 따르며 살았다. 그러나 최근 나 자신을 돌아보며 내가 이러한 문화를 무척이나 힘들어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위도 싫지만 내 아래 누군가가 있다는 건 더 싫다. 사람끼리 왜 굳이 위아래를 정해야할까.
먼 과거를 돌아봐도 나는 이러한 문화를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혈연과 학연을 제외하곤 언니 동생이라는 호칭을 쓰는 사람이 아예 없을 정도이다. 상대가 서로 말을 놓고 언니, 동생 하자고 권해도 '저는 그냥 존댓말 쓰고 싶어요.' 라며 거부하고 결국 깊은 관계로 발전하지 못했었다. 이런 나의 경험을 돌아보니 우리의 문화인 존댓말과 반말, '말 놓자!'의 개념은 서로가 친해지는 발전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 느껴지는데 이 또한 재미있는 것 같다. 그렇다고 이 새로운 발견의 좋은 의미 때문에 내가 싫은걸 억지로 하고 싶진 않다. 아니면 정말 언니, 오빠, 그리고 동생삼고 싶은 사람을 못 만났을 수도 있다. 어쨌든 이 땅에서 살아가기에 힘든 특성을 가진 사람임에는 분명하다.
직위로 불리는 게 별로였던 건, 내 이름 옆에 붙여지는 직위가 '진정한 나'를 반감시킨다는 느낌이 들어서 일수도 있겠다. 직위가 없던 사원 시절엔 그나마 직위를 갖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처음으로 대리 직함을 달고 1년도 안돼서 별로인 느낌(?)이 들었다. 이름보다 '대리님~'이라는 표현을 더 많이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첫 회사에서 대리 승진을 하며 처음 직위가 생길 때 대표님께서 '디어문이 외부행사 가서 사원 명함 내밀고 있으니 사람들이 무시하는 것 같아서 승진시킨다.'라고 말씀하셔서 진짜 대리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기도 했었다. 대리 승진했다고 연봉이 오른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더 기쁘지 않았던 것 같다. 회사 사정으로 전 직원 연봉이 삭감되었던 시기니까. 어쨌든 그 후로 오랫동안 대리님 소리를 들었지만 처음 통화하는 거래처나 외부사람에게 상대가 먼저 묻지 않는 한 스스로 내 이름에 직위를 붙여서 말한 적이 없다. 보통 업무통화할때 상대가 내 이름을 물으면 항상 "저는 이지은(가명)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가끔씩 같은 사무실 직원들이 "저는 김OO 과장입니다."라고 스스로를 소개하는 거 보면 그 자체가 신기했다. 뭔가 직위를 통해 처음 자기를 소개하며 우월감을 나타내는 것 같았달까.(그냥 순수한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다.)
지금 회사에서는 연구원들에게는 대외적인 수석, 책임 등의 연구 직위를 부여한 것 같은데 나에게는 정식으로 직위를 주진 않았다. 어쨌든 직위를 부여한다 해도 내부에서 서로를 칭하는 건 오직 영어 이름이다. 내가 오기 전 급여대장을 작성하던 이사님은 그 문서 속 내 이름 옆에 '대리'라고 적어놔서 '나는 대리인가 보다.'생각했는데 대표님은 어디 지원사업 신청하며 담당자 정보를 적을 때마다 나를 '과장'이라고 적으셨다. 전통적인 회사처럼 인사시스템이 없다 보니 이런 게 명확하지 않을 때가 많다.(어쨌든 두 분이 내 직함에 대해 논의한 적 없는 것은 확실!)
대외적인 직함은 아직도 외부업체와 통화할 때 사람들이 자주 물어본다. 이럴 때마다 나는 과장이라고 대답해야 하는지 대리라고 대답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서 그냥 '매니저'라고 대답한다. 심지어 대표님이 지원사업 담당자 정보에 '과장'으로 적어놓으셔도 제출 전에 내가 '매니저'로 바꾼 적도 몇 번 있다.(ㅋㅋ) 경영지원 매니저로 채용되기도 했고 이사님이 명함에 '매니저'만 넣어주셨기(?) 때문이기도 하다. '매니저'라는 말에 뜻은 다소 광범위 하긴 하지만 어쨌든 관리업무를 하는 사람은 맞으니 역할에 맞는 직함이라는 생각이 든다. 음.... 회사에서 영어 이름으로 서로를 부르는 이야기를 하다 내가 느끼는 직위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 길어져버렸다. 내부에서야 영어 이름으로 충분히 소통 가능한데, 아무래도 외부에 까지 '저는 XX(회사 이름)의 '제니(가명)'입니다.'라고 소개할 순 없으니 대외적인 직함은 우리나라 조직문화상 아직은 필요하다. 직함으로 업무 수준과 권한을 나타내기도 하니까.
현재 재직 중인 회사에서 채용공고에 영어 이름 사용한다는 것을 보긴 했고 면접 때도 면접관끼리 서로 영어 이름을 자연스럽게 쓰는 걸 봤었다. 입사가 확정되고 나의 영어 이름(닉네임)을 보내달라고 하는 메일을 받고 겪어보지 못한 문화에 조금 신기했다. 과연 영어 이름 부른다고 정말 수평적 문화에 효과가 있는 걸까?
사실 내가 다니는 회사는 완벽한 수평적 문화는 아니다. 그래도 철저한 수직구조 회사를 다니던 사람들이 회사를 차리며 '우리는 수평적 문화를 위해 내부에선 영어 이름을 쓰자.'라는 시도 자체에는 나름 전통적 Top-down 방식을 개선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완벽하진 않아도 이정도면 개개인의 업무에 자율성이 있고 상대의 직함에 막히지 않아 자유롭게 의견을 낼 수 있다. 아직은 수직문화와 수평문화가 섞여있지만, 그래도 아주 의미가 없지 않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나보다 어리고 연차도 낮은 직원들도 나에게 '제니'라고 부르며 업무적인 요청을 하는데 예전에 '대리님'이라고 불릴 때보다 훨씬 듣기 편하다.
개인적으로는 '어느 회사에 어떤 일 하는 대리'라는 느낌보다 '어느 회사에서 어떤 일 하는 제니'라는 느낌이 더 좋다. 그리고 실제 본명과 다른 이름인 영어 이름으로 불리면서 '회사의 나'와 '실제의 나'가 분리되는 느낌도 꽤나 좋다.(또 언급하지만 외부에는 어쩔 수 없이 본명을 쓸 수밖에 없다.) 출근해서는 '제니'로 살다가 퇴근 후에 '이지은'으로 돌아오는 느낌이랄까?
이렇게 나에겐 닉네임을 부르는 문화에 여러 의미가 있다. 서로 직함을 쓰지않고 대화하며 수평적인 문화를 추구하고, 내가 불리기 원하는 이름보다 흔하디 흔한 직함으로 불리며 내 급을 항상 강제로 상기해야 했던 불편함이 해소되었다. 닉네임으로 불리며 실제의 나와 회사에서 일하는 나를 분리할 수도 있다는 것으로 퇴근 후엔 회사 생각하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것에 더 집중할 수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