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상의 소소한 행복과 공감 07 >
애들이 어릴 때 아내는 엄마로서 굳은 결심을 한 듯 보였다.
'아이들에게 절대로 라면, 인스턴드 식품이나 탄산음료 등은 먹이지 않을거야.'
아내는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힘든 가운데서도 나와 번갈아 가면서 집에서 아침, 저녁으로 꼭 아이들의 밥을 해 주었다. 아내의 이런 결심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기는 했다.
장사를 하셨던 장인어른과 장모님은 아내가 어렸을 때 저녁마다 맞춰서 밥을 챙겨 주기가 쉽지 않은 여건이었다. 물론 어른들이 한창 경제활동을 하던 80-90년대를 떠 올리면 내 또래의 많은 이들은 아마 비슷한 경험들이 있을 거다.
"그래서 오빠와 난 저녁 늦께까지 과자를 먹으면서 엄마가 집에 와서 밥을 챙겨주길 기다렸어. 우리 애들한테는 꼭 따뜻한 저녁밥을 먹일거야."
"나도 비슷했는데. 왜 기다렸어? 그냥 라면 끊여먹지?"
"불이 나면 위험할 수도 있고."
실제로 아내는 어린 시절에 집에 불이 난 경험이 있었던 터라
불을 쓰는 건 조심해야 했을 수 있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까지는 아내의 이런 결심은 잘 지켜지는 듯 보였다. 덕분에 나도 1년에 라면을 먹은 날이 손으로 꼽아야 할 정도였다. 하지만 아이들이 용돈을 받기 시작하고,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이런 노력은 그냥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어 갔다.
어느 연예인 부부가 티비에서 했던 얘기가 떠올랐다.
"아이들을 라면 절대 못 먹게 했는데. 어느 날 놀이터에 갔는데 둘이 미끄럼틀 아래에 숨어서 컵라면을 그렇게 맛있게 먹고 있는 거에요." "못 먹게 해 봐야 다 소용 없어요."
그 연예인 부부의 말처럼 집에서 쓰레기 분리수거를 할 때면 재활용 종이 아래로 아이들이 감춰놓은 일회용 라면 용기가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좀 더 커서는 어릴 때 못 먹게 막은 역효과인지 탄산 음료를 미친듯이 사 먹기 시작했다.
가지 말라는 길은 꼭 가보고 싶고, 돌아보지 말라고 하면 꼭 돌아보게 되듯이 충족되지 않는 욕망이 더 무서운 건가?
어느 날 둘째 아이에게 심각하게 물어봤다.
"라면 좀 적당히 먹어. 그렇게 맛있어?"
"응. 먹을 때마다 맛있어."
천진난만하게 웃으면서 말하는 아이. 이 순수한 영혼이란.
사실 애들 어릴 때 마트에서 쇼핑을 할 때면 아내 몰래 시식 코너에서 작은 종이컵에 받아서 아이들과 급하게 나눠 먹던 라면이 얼마나 맛이 있었나.
게다가 나도 초등학교 때 점심시간에 라면을 먹겠다고 집까지 뛰어가서 얼른 끓여 먹고 돌아온 적도 몇 번 있긴 했었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라면이 뭔지 알아?"
"뭔데?"
얼마전 일본에 가족여행을 갔을 때 작은 방 두 개에 나눠서 자야했다. 코를 고는 터라 나는 둘째와 같은 방을 쓰게 됐다. 저녁으로 대게와 샤브를 두둑히 먹었는데도 밤이 되자 배가 고파왔다. 나는 숙소 근처의 편의점에서 컵라면 두 개를 사 들고, 의기야양하게 숙소로 돌아와서 아이와 나눠 먹었다.
"역시 라면은 몰래 먹는 라면이 제일 맛있다니까."
그런데 세상에는 "맛없는 라면"도 있기는 하다. 어릴 때 시골에서 살았던 나는 어느 날 학교 친구들로부터 "짜장 라면이 그냥 라면과 비교가 안 될 만큼 맛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시내에 가야 짜장 라면을 살 수 있었던 터라 며칠을 엄마를 졸라서 드디어 손꼽아 기대하던 짜장 라면을 먹게 됐다.
"이거 맛이 왜 이래?", "그러게. 원래 맛이 이런 거야?"
"그냥 라면이 나은데."
나처럼 기대했던 형과 여동생은 "짜장 라면"의 맛에 큰 실망을 했다. 다음 날.
"야! 누가 짜장 라면이 맛있다고 했어? 맛 되게 없던데. 싱겁기만 하고."
"너 그거 끓일 때 물 버렸어? 안 버렸어?"
그냥 라면처럼 엄마가 끓인 국물이 정말 넉넉한 짜장 라면, 정말로 '맛없던' 라면. 그러나 언제라도 웃으며 말할 수 있는 짜장 라면에 대한 나의 기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