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나의 새 봄
08.
서울의 봄 공기는 홋카이도의 바람과는 전혀 달랐다. 신선한 공기 대신, 여전히 회색 먼지가 목을 막았다. 그럼에도 이현은 책상에 앉았다. 일본민박집 공용 테이블 위에서 꺼내지 못한 문장들이 노트북 화면 위에서 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오타루에 가면 날 온전히 이해해 줄 누군가를 만날 수 있을까.’
그 문장이 원고의 첫 줄이자, 그의 시작이었다. 밤마다 그는 홋카이도의 색깔들과 냄새들, 그리운 사람들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미오의 웃음, 이츠키의 사탕, 타구미의 따뜻한 말투, 그리고 폭우 속에서 미오의 손을 잡았을 때 느꼈던 온기까지.
글은 생각보다도 빨리 진도가 나갔다. 마치 그곳에서 이미 다 써놓은 원고를 가져와서, 서울에서 그대로 옮겨 적는 것처럼.
세 달 뒤, 이현의 첫 책이 드디어 출간되었다. 표지에는 이현이 찍은 오타루 운하의 겨울 야경 사진이 실렸다. 흰 눈이 운하 양 옆길에 쌓여 있고, 가스등 불빛들이 물 위에서 길게 번지고 있었다.
이현의 책은 SNS를 타고 입소문이 났다.
“도망의 미학이 아니라, 살아냄의 리듬.”
어떤 독자가 남긴 짧은 독서평이 이현의 마음에 남았다. 부모님의 전화를 받았다.
“현아, 네 책이 신문에 나왔더라. 주변에서 책 내용이 너무나 좋다고 난리야. 언제 한 번 여기 내려와서 작가 싸인을 좀 해 달라고.”
그 목소리를 듣자 이현은 부모님에 대한 오래된 마음의 빚이 조금씩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출간 한 달 후에, 홍대의 어느 유명 북카페에서 북토크가 열렸다. 관객석 뒤쪽에 앉아 있던 한 여자가 모자를 벗었다.
짙은 갈색 머리, 반달처럼 접히는 눈웃음을 짓는 여자.
“오타루에 가면 날 온전히 이해해 줄 누군가를 만날 수 있을까 라고 하셨죠? 그래서 만나셨나요?”
미오의 목소리였다. 이현은 대답하기를 잠시 멈췄다가, 웃으며 말했다.
“네. 만났어요.”
그녀는 이현에게 책을 내밀었다.
“작가님! 사인해 주세요. ‘미오에게, 계절이 돌아왔다’라고.”
이현이 사인을 하고 펜을 내려놓자, 미오는 속삭였다.
“이젠 나는, 예전의 반쯤은 꾸며진 내가 아니에요. 온전히 나예요.”
두 달 뒤에, 이현은 또 한 번 홋카이도 비에이 버스터미널에 내렸다. 이번엔 도망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여행이었다. 타구미 씨는 여전히 민박집 마당에서 키까지 자란 풀을 삽으로 치우고 있었다. 이츠키가 그 옆에 함께 하고 있었다.
이현은 미오와 함께 오타루 운하를 걸었다. 마침 지역 축제가 시작됐다.
수백 개의 촛불이 운하 위를 따라 떠 있었고, 촛불은 바람에도 꺼지지 않았다.
“이젠, 나도 온전히 내가 되었고, 이현 씨도 제 길을 찾은 것 같네?”
미오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런 ‘내’ 옆에 이현 씨가 함께 있으면 좋겠어요.”
이현은 폭우 속의 그날처럼 미오의 손을 따뜻하게 잡았다.
그해 겨울, 이현은 두 번째 원고를 쓰기 시작했다. 제목은 아직 없었다.
다만, 시작을 여는 문장들은 이미 그의 마음속에 있었다.
‘내가 그녀와 헤어진 건 그녀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닌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도망처럼 떠나 도착한 어떤 도시는 느리게 사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 도시는 사람의 속도를 바꾸고, 결국 마음의 모양까지도 바꾸었다.’
이현은 알았다. 오타루에 가면, 그는 언제나 자신을 찾게 될 거라는 것을. 그리고 그곳엔, 이제 반갑게 그를 기다리는 누군가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