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이별은 만남을 남기고
07.
오타루 길거리에 쌓인 눈이 조금씩 녹아 돌바닥이 드문드문 드러났다. 이현은 아침 출근길에 잠시 걸음을 멈췄다. 신선한 초봄의 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스쳐 지나갔다.
'한 계절이 끝나가고 있군. 이제 나도 떠나야 한다.'
그 생각이 이현의 가슴 한쪽을 서늘하게 했다. 점심 무렵, 가게 앞 벤치에 이츠키가 앉아 있었다. 그는 사탕 봉지를 열어 하나를 꺼내 입에 넣었다.
“이현, 솔직히 말할게.”
“뭐에요?”
“나… 미오 좋아해. 오래전부터.”
그의 말은 농담도, 장난도 아니었다. 이현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알고 있어. 사실은… 나도.”
둘은 잠시 말이 없었다.
"이츠키 씨는 미오를 좋아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영화 러브레터의 주인공처럼 이름이 같은 여성인 '이츠키'를 사랑해야 하는 거 아니야?
이현이 툭 던진 농담에 이츠키가 크게 웃었다.
“이현 씨 농담 잘 하네. 우리 친구하면 안 되요?"
"좋아. 이츠키."
두 사람은 손을 내밀어 악수했다.
"결국, 우린 같은 한 사람을 보면서 같은 길을 걸었네.”
이현은 가게 안의 미오를 한 번 본뒤에 이츠키에게 말했다.
“그 길의 끝은 어디일까?”
이츠키 역시 미오와 이현을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
“모르지. 근데 저 사람이 웃을 수 있다면, 그게 그 길의 전부여도 난 괜찮을 것 같아.”
이현은 진심이었다.
그날 저녁, 가게 정리 후 미오가 이현과 이츠키를 불렀다.
“두 사람 다 나 좋아하죠?”
두 남자는 동시에 눈을 피했다.
“근데 지금 나는 사랑보다는 먼저 살아야 해요. 오빠랑 나, 괜찮아지면 사랑은 그 후에 생각할 거에요.”
이츠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그때까지, 난 네 편이야.”
이현도 역시 이츠키의 마음과 마찬가지였다.
“나도.”
며칠 뒤, 타구미가 민박집 마당에서 눈을 쓸고 있었다.
“곧 떠날 거라며?”
“네. 이제 돌아가서 내 일을 해야 할 것 같아요.”
타구미는 빗자루를 세우고 이현을 보았다.
“떠나는 건 나쁜 게 아니야. 눈이 그치고 나무에서 새로운 싹이 돋는 건 계절의 순리지.”
그리고 덧붙였다.
“다만, 사람 마음 속에 쌓인 눈은 그냥 눈보다는 늦게 녹는다는 것을 기억해. 모든 것은 때가 있어. 그걸놓치지 말라고.”
서울로 돌아가기 전날 밤, 미오가 전화를 했다.
“우리! 운하에서 봐요.”
오타루 운하는 봄날의 상쾌한 바람이 불어서 물결이 잔잔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서울로 돌아간다면서요?”
“응. 여기서 시작한 이야기를 거기돌아가서 마무리하려고요.”
“마무리?”
미오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말했다.
“그 말이 끝을 뜻하는 건 아니죠?”
“아니. 다음 장을 뜻하는 거야.”
그녀가 가볍게 웃었다.
“그럼 나도 내 다음 장을 준비해야겠네요.”
이현이 한국으로 귀국하는 날. 역 플랫폼으로 기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이츠키가 사탕 하나를 건넸다.
“가서 책이 나오면, 나한테 제일 먼저 보내라.”
“당연하지.”
미오는 가만히 손을 내밀었다.
“이현 씨, 기억해요? 나는 꾸며진 내가 아닌, 온전히 내가 되고 싶다고 했던 거.”
“응. 기억해요.”
“이현 씨를 다시 보는 날에는 그걸 과거형으로 말하고 싶어.”
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오 씨가 꼭 그렇게 말하게 되길 바랄게요.”
기차 문이 닫히고, 플랫폼이 이현의 시선에서 천천히 멀어져 갔다. 창밖으로 두 사람이 서 있는 모습이 점점 작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