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
06.
민박집 창문을 열자, 바닷바람이 서늘하게 스며들었다. 폭우의 기운은 사라지고, 바다 위엔 얇은 안개가 얹혀 있었다. 해변의 자갈은 밤새 파도에 씻겨 반짝였다. 멀리 어선 몇 척이 느릿하게 항구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현은 부엌에서 물을 끓였다. 작은 주전자 안에서 물방울이 차오르는 소리와, 바깥에서 들려오는 갈매기 울음이 묘하게 어울렸다. 거실에 나오니 미오가 두 손으로 머그컵을 감싸 쥐고 앉아 있었다.
“잘 잤어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조용한 곳은 처음이에요.”
그 목소리에는 약간의 불안을 뛰어넘는 더 큰 안도감이 섞여 있었다. 이츠키는 민박집 마당에서 삽으로 잡초를 뽑고 있었다. 타구미는 항구 근처 작은 카페에 가서 연락망을 확인하고 돌아왔다.
“아직은 움직임 없어. 폭우 때 우리가 흔적을 잘 지운 모양이야.”
네 사람은 오전 내내 각자 할 일을 했다. 이현은 창가에 앉아 노트를 펼쳤다.
‘폭우 속에서 사람을 지켜주는 건, 비로부터 사람의 몸을 보호하는 게 아니라 그 마음을 감싸는 일이다.’
한 문장을 쓰고 나서 이현은 한동안 펜을 내려놓고 파도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미오는 부엌에서 타구미, 이츠키와 함께 식사 준비를 도왔다. 그녀가 칼로 양배추를 써는 소리가 일정한 리듬을 탔다. 그 리듬 속에 이현은 묘한 평온을 느꼈다.
오후가 되어, 이현과 미오는 해변을 걸었다. 바다는 약간의 봄빛을 띠면서 더 맑은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모래 위에 길게 뻗은 해조류가 햇볕에 말라 있었다.
“여긴… 공기가 다르네요.”
“서울하고는 확실히.”
이현이 대답하자, 미오는 바닷바람에 머리카락을 맡기며 웃었다. 잠시 걷다 그녀가 물었다.
“어제, 무서웠죠?”
“조금.”
“근데 왜 그랬어요? 그 사람들한테 잡힐 수도, 위험할 수도 있었는데.”
“난 어떻게 되든 괜찮아요. 그런데 미오 씨를...”
이현은 말을 멈췄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미오 씨를 그렇게 혼자 두고 싶지 않았어.”
미오가 이현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 말, 잊지 마요.”
저녁 식사 후, 이츠키와 미오는 설겆이를 하고 있었다. 타구미는 난로 옆에 앉아 있는 이현에게 낡은 상자를 열어 보여 주었다. 그 안에는 오래된 명함과 사진 한 장이 있었다.
사진 속 타구미는 젊었고, 옆에는 웃고 있는 아내와 그의 아들인 어린 이츠키가 있었다.
“내가 조직에 있었을 때, 아내는 상대 조직에 지금의 미오처럼 붙잡혀 있었어.
어느 날 내가 그녀를 구해낸 뒤로 양 조직에서 이로 인해 한동안 큰 싸움이 계속 됐지.
내가 친구와 같이 상대 조직의 두목을 해치우고 혼자 죄를 다 뒤짚어 쓰고 감옥에 다녀오는 동안에 이츠키의 엄마, 즉 아내가 교통사고로 죽었어. 그 때 이츠키가 겨우 3살이었어.”
그의 목소리는 지난 시간에 대한 후회로 가득찬 듯이 보였다.
“출소 이후. 난 조직도 버리고 민박집을 열고 이츠키만 잘 키우면서 살려고 노력했다. 이 손가락도 조직을 떠나면서 절연의 의지로 자르고 나온 거야."
타구미는 이현에게 왼쪽 검지손가락 두 마디가 사라진 손을 들어서 보여줬다.
"나중에 이츠키가 나 때문에 엄마가 일찍 죽었다고 오해하고, 어린 나이에 일찍 집을 나가긴 했지만.”
그는 사진을 한참 더 바라봤다.
"혹시 이츠키 이름이 영화 러브레터의 주인공을 따라 한 거에요?"
"이현 군도 그 영화를 알고 있어? 오래전에 나온 영화인데. 아내와 같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영화가 레브레터였지. 아내가 그 영화를 너무 좋아해서 우리 아이 이름을 그렇게 지은 거지."
다쿠미는 상자를 조심해서 닫았다.
“사실 이츠키를 지키기 위해 미오가 곤경에 처해 있어도 난 모른척 그냥 지나치려 했어. 예전처럼 소중한 사람, 아들을 잃게 될까 봐. 두려워서.”
타구미 씨의 큰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이츠키도 그런 마음을 이해해 주겠죠? 타구미 씨! 그런데 이번에는 왜 움직일 결심을 하신 거에요?"
"너가 용기를 내는 걸 보고, 이츠키도 미오를 많이 좋아하고... 피하는 것만이 정답은 아니라고 생각했지."
이현은 문득 혼자서 긴 시간동안 외로웠을 이 사내가 불쌍해졌다.
"이현! 너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한 때 나는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세고 가장 돈이 많은 남자가 되고 싶었다. 그게 아내와 이츠키를, 우리 가족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거라 믿었지. 하지만 아니었어. 세상에서 가장 힘이 있고 돈이 많은 사람이 될 수는 없지만 네가 마음만 먹으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될 수는 있다는 걸 기억해."
이현은 오랜 시간의 외로움 끝에 타구미 씨가 도달한 결론을 듣고는, 그 문장들을 마음에 새겼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다.'
며칠 후, 하늘은 맑았지만 바람은 서늘했다. 타구미가 모두 한자리에 모아 놓고 말했다.
“슬슬 돌아가자. 뒷일은 내가 몸 담았던 조직에서 깔끔하게 잘 정리가 된 모양이다.”
돌아가는 길, 차 창밖으로 펼쳐진 홋카이도는 봄을 맞으려 준비하는 논과 연한 노란색 숲, 푸른하늘이 하나로 이어져 있었다. 이현은 창문을 열고 공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미오는 뒷좌석에서 조용히 그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한결 밝아 보였다.
구라노키 카페의 문을 열자, 커피 향이 반갑게 맞았다. 유리공방 장인도 고개를 들어 인사했다. 미오는 짧게 웃고, 바로 주방으로 들어갔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이현은 카운터에 서서 그녀가 바삐 움직이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