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와의 만남"

< 일상의 소소한 행복과 공감 17 >

by 달여울 작가

"형! 거기에 회사 일로 출장 가는데 얼굴 한 번 봐요."

"아! 그래. 연락해!


대학을 졸업하고 십 년도 훨씬 넘게 지났는데 갑자기 대학 후배가 연락을 했다. 그동안 다들 결혼을 하고 회사 생활 하느라 애들 키우느라 이래저래 바쁜 시간을 보냈을 거고, 이제 인생이란 마라톤의 반환점에 가까워지는 나이이다.


'이제야 한숨 돌릴 여유가 생긴 걸까? 갑자기 연락을?'


가끔 통화하는 친한 대학 동기를 통해서 간간히 그 후배의 소식은 들어왔다. 학사장교로 군에 갔고, 제대 이후 일반 회사에 취업해서 평범하게 회사를 다니고 있다고 했다. 나처럼 평범한 회사원.


내가 근무하는 회사까지 후배가 찾아와서 근처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약속 당일. 십 수년만에 보는데 예전 그 모습은 남아 있었다. 물론 후배의 젊음은 조금 사라졌고, 넉넉한 몸매로 나타나긴 했다. 후배 눈에도 나의 눈가에 생긴 깊은 주름이나 아저씨 같은 모습이 한 눈에 들어 왔으리라.


"형! 이거!"


후배는 건강을 챙기라면 짜 먹는 홍삼 건강식품 한 상자가 든 종이백을 건넸다.


"야! 그냥 오지. 뭘 이런 걸 사들고 왔어. 저녁에 왔으면 소주라도 한 잔 하는 건데."


회사 근처에 평소 자주 가던 중국음식점에서 식사를 하고, 식사 후에 커피숍에서 차를 한 잔 마시면서 살아온 얘기, 학교 선.후배들 근황까지 이러저러한 얘기를 나눴다.


후배가 이렇게 갑자기 나를 찾아온 이유는 최근에 절친한 중학교 동창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뭔가 공허함이 생겨서,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학교 선.후배와 동기들을 만나고 싶어져서 였다고 했다. 그 후배가 만나고 싶은 선배 중에 한 명이어서 고마웠다.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을 경험하면 이렇게 사람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평소에 바빠서 남일처럼 전혀 인식하지 못 했던 나의 '죽음'까지도 언제든지 있을 수 있다는 걸 깨닫고, 삶의 태도를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후배는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인생에서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많이 갖자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는 대학 학과 동문들을 위한 카톡방을 만들고, 동문 모임을 주최해서 참석하고 학과 후배들이 준비한 행사에도 참여하는 등 열성을 보였다.


'후배가 친한 친구의 죽음으로부터 오는 슬픔과 상실감을 극복하는 나름의 방법이겠지.'라고 생각했다.


친한 사람들의 죽음 또는 인간의 죽음에 대해서 성인이나 깨달은 이들의 태도는 저마다 차이가 있다.


'장자'는 아내의 장례식에서 북을 두드리면서 자연에서 태어나서 자연으로 돌아갔다면서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평범한 그의 친구 눈에는 그 행동이 너무나 지나쳐 보였는지 부인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냐고 질책했다고 한다.


'부처'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만물이 고정된 것이 없고 계속 변한다는 '제법무상'의 깨달음 아래 '생로병사'에 집착하지 말 것을 가르쳤기 때문에 삶과 죽음이 다르지 않다고 보았다.


평범한 사람들은 이렇게 장자나 부처와 같이 죽음에 대해 통달하거나 담담한 태도로 맞기는 어려울 것이다. 인간이 느끼는 고통의 크기를 1부터 최고 수준인 10까지로 표현 하면 배우자의 죽음으로 인한 고통은 9 수준이라고 한다.


주변에서도 가족이나 친구 등 가까운 이들의 '죽음'으로 '우울감'을 느끼거나 괴로워하는 분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방송을 통해 잘 알려진 어느 물리학자는 인간은 분자로 이루어졌으므로 죽음은 분자가 작은 단위로 해체되는 과정이고, 언젠가 그 분자들이 다시 생명으로 모일 수도 있지 않냐는 물리학적 입장을 표명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솔직히 최근 지인의 죽음에서 오는 '슬픔'을 어떤 방식으로든지 설명하고 '위로'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내가 아는 지인 중 한 분은 아버님의 임종을 온 가족이 옆에서 지키면서 '사랑한다'는 말을 가족들 모두가 돌아가면서 말하면서 잘 보내드려서 다행이었고,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고 말했다.


다른 지인 한 분은 평소 부모님과 그렇게 애틋하게 정을 나누거나 그런 관계는 아니었지만 두 분이 최근 몇 년 사이에 차례로 돌아가시면서 '관계'가 '단절'되었다는 느낌과 상실감을 느끼면서 여전히 많이 힘들어하신다.


이렇게 가까운 지인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정도와 슬픔을 헤쳐나가는 방법은 사람들마다 다를 수 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이런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는 없겠지만 가능하면 '자신'을 '해치지 않는' 수준으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렇게 자신에게 질문을 해 보는 것이다.


"돌아가신 그 분이 나를 어디선가 지켜보고 계신다면 내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길 원하실까? 실의에 빠져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낙담한 채로 살아가길 원할까? 아니면 가끔 당신과 함께한 추억을 떠올리면서 추모하는 슬픔의 시간을 갖더라도 대부분의 시간은 오로지 자신을 위해서 잘 살아가길 원할까?"


이렇게 생각을 해 보면 스스로에게 조금은 위로가 되지 않을까 싶다.


최근에 어느 유명 코미디언의 장례식에서 후배 코미디언이 춤을 추는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우리에게 웃음과 눈물을 동시에 가져다주는 마음이 따뜻하면서도 아린 장면이었다. 아마도 그 행동은 후배가 선배 코미디언을 '추모'하고, 자신도 다시 잘 살아가기 위한 '위로'의 과정이 아니었을까?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인생에서 필요한 소중한 가치 중의 하나인 사람들과의 '관계'를 다시 생각한 후배처럼 모두 자신만의 방식으로 지인의 죽음에서 오는 상실감과 우울함이 있다면 잘 극복하시길 희망한다.



월,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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