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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현수 Jul 06. 2020

명가수를 찾습니다.

가수가 되려면 가수  선발 대회에 나가야 했다.

토론토의 명가수를 찾습니다.”

한국 그룹 원조격인 저고리 시스터즈 (1935. 사진 위)


  한국 최초의 가수 선발대회는 1933년 10월, 콜럼비아 레코드사가 주최하고 조선일보가 후원한 <명가수 선발 음악대회>인데, 전국을 순회하면서 대회를 열었다.  경성(서울)을 시작으로 평양, 부산, 대구, 진주, 신의주, 함흥, 군산, 청주, 원산 등 10개 지역에서 각 3명 정도의 가수를 선발해 이듬해 경성에서 예심으로 19명을 선발했다. 2월 17일 소공동 장곡 천공 회당에서 열린 최종 결선대회의 심사위원은 메리 영(이화 여전 음악교수), 현제명(연희전문 음악교수), 윤성덕(성악가/ ‘사(死)의 찬미’로 유명한 윤심덕의 여동생), 김준영(콜럼비아 레코드사 작곡가)이었다.

<명가수 선발 음악 대회> 신문광고

     이 대회는 신종 직업인 가수를 하기 위해  일본에서 음악 공부를 한 윤건영, 정찬주, 황창연 등 5명이 응모하였고, 함경도 대표는 멀리 간도(중국 연길)에서도 응모하는 등 그 열기가 대단하였다.  경성 라디오 방송국에서는 최초로 공연 실황 중계까지 한다. 성황리에 끝난 대회의 최종 선발 가수는 1등에 전남 대표 정일영, 2등에 경남대표 고복수, 3등에 함북 대표 조금자였다.  선발된 여자 가수들은 연일 라디오와 공연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는데, 남자 가수인 고복수는 신곡 조차 배당받지 못한다. 콜럼비아 레코드사가 남자보다 여자 가수들을 발굴해서 키우는데 전력했기 때문이다. 이에 경쟁사이던 OK 레코드사가 고복수를 재빨리 스카우트해서 ‘타향살이’를 부르게 하여 일약 스타를 만든다.  결국 1934년 명가수 선발 음악대회는 대중가요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되고 직업 가수의 열망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34 명가수 선발 음악대회에서 뽑힌 정일영(왼쪽)과 조금자

   1959년 부산 MBC가 개국하며 ‘직장 대항 가요대전’이라는 공개 프로그램이 생기는데, 이 프로가  모창 가수 선발대회의 원조라 할 수 있다.  각 단체나 기업에서 3명씩 출전해 상대 팀과 예선을 거쳐 연말에 결선을 치렀는데, 1등은 작곡가 한산도(‘동백아가씨’ 작사)의 동생인 한무웅(병기 기지 사령부), 2등은 ‘추풍령’으로 유명한 남상규(공병 기지 사령부), 3등은 ‘덕수궁 돌담길’을 부른 진송남(동산유지)이 차지했다. 이 대회는 기성 가수 흉내를 잘 내는 사람이 우승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기성 가수의 노래를 레코드로 1절을 듣고, 이어서 경음악단이 연주를 하면 참가자가 따라 부르는 형식이었다. 당시 3등을 차지했던 진송남은 고등학생이었는데, 3년 뒤에 부산 MBC의 전속 가수에 합격한다.

   이 대회의 공식 스폰서가 바로 진로소주다. 당시만 하더라도 진로는 부산 변두리인 구포 근처에서 가내 공업 규모의 술도가였기에 안동의 금곡(금복주가 아님), 전라도의 보해, 마산의 무학, 부산의 대선에 짓눌려 오금을 못 펴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부산 MBC가 개국하며 진로소주를 위해 CM송을 제작해주는 조건으로 이 대회의 스폰서로 유치한다. 그래서 <진로 파라다이스>라는 한국 최초의 CM송이 탄생한다.

“야야야 야야야 차차차/야야야야 야야야야 차차차/진로 진로 진로 진로/야야야야 야야야야 차차차/향기가 코끝에 풍기면/혀 끝이 짜르르하네/…. 진로 한 잔 하고 커어 하면/진로 파라다이스”

말로만 떠 벌이던 방송 광고(CM송)가 차차차 가락을 끼고 나오자 사람들은 어리둥절했다. 가는 곳마다 <진로 파라다이스>의 차차차 리듬이 퍼져 나갔고  운동장에서는 응원가로 각종 행사에서는 춤사위의 가락으로 울려 퍼지는 판국이 된다. 작곡은 당시 부산 MBC 경음악단장이던 허영철이 하였고, 노래는 전속 가수였던 김지곤, 진송남 등이 불렀다. CM송 마지막의 멘트, ”커어, 역시 진로야!”는 탤런트 전운이 병아리 성우 시절에 목소리를 담은 것이다.                                                                         

문주란은 고등학생 시절 라디오 노래자랑 프로에 참가해  가수가 된다.

  당시 노래자랑 프로는 가장 인기 있는 라디오 프로그램이었는데, 전속 가수들은 매주 한 사람씩 심사위원이 되어 예심에 참가했다. 매주, 1~ 2백 명 정도 응모하였고, 그중 십여 명 만 선발하기 때문에 시간도 없어 무반주로 몇 소절씩 듣는 것이 고작이었다. 진송남에 의하면 “한 번은 문필연이라는 여학생이 응모했는데, 너무 어려서 노래도 들어보지도 않고 졸업 후에 다시 오라고 달래서 내 보냈다. 심사를 마치고 일어서는데, 밖에서 기다리던 오빠가 동생의 노래를 한 번만 들어 봐 다라고 사정해서 듣게 된다. 현미의 ‘보고 싶은 얼굴’을 듣는 순간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이 깜짝 놀란다.  피아노 반주에 다시 시켜보니 안정된 저음에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그래서 그 주에 출연자를 다음에 오게 하고 예심에 그를 뽑았다. 그 여학생이 바로 가수 문주란이다.”라고 밝힌다.  

   문주란의 롤모델이던 현미는 원래 미 8군 무용수 출신이다. 1962년 번안곡 ‘밤안개(It's a lonesome old town)’로 데뷔한 그녀는 마할리아 잭슨(Mahalia Jackson)의 끈끈한 탁음과 창법을 흉내 낸다. 그 시절, 미 8군 무대 출신 가수들이 인기를 끌며 4명의 학사 가수들이 왕성한 활동을 했는데, 최희준은 냇 킹 콜(Nat King Cole)의 허스키한 목소리를 흉내 냈고, 박형준은 페리 코모(Pierino Ronald Como)의 미성, 위키 리는 바비 다린(Bobby Darin)을 빼다 놓았으며, 유주용은 한국의 후랭크 시나트라(Frank Sinatra)를 자처하였다.  이밖에도 김상국은 루이 암스트롱(Louis Daniel Armstrong), 조영남은 탐 존슨(Tom Jones), 이춘희는 카테리나 바렌테(Caterina Vallente), 영사운드는 비틀스(The Beatles)를 흉내 냈다.

가수 현미 초창기 시절

   한국일보와 토론토 북부 번영회가 공동으로 주최하는 ‘한가위 히든싱어 선발대회’에서 명가수를 찾고 있다. 이 대회는 기성 가수의 모창이나 성대 묘사, 춤을 흉내 내는 재주꾼을 뽑는다. 끼 많은 이들의 참여를 기대한다. <2014.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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