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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현수 May 03. 2021

<부활>을 본‘화(花)요일아침’에…

8년 전, 한국에 있는 여동생이 토론토로 오는 딸아이 편에 보내준 홍문택 신부가 지은 <오늘은 잔칫날이었습니다>라는 책을 지난해, 책장에서 끄집어내어 컴퓨터 옆에 챙겨 놓았다. 그리고 또 몇 달을 묵혔다. 책이라고 하지만, 시와 그림으로 구성되어 부지런만 떨면 몇 시간 만에 다 읽을 수 있는데 말이다.


오늘 아침, 이태석 신부의 다큐 영화 <부활>의 서머리(Summary) 편을 보았다. 서머리는 콘텐츠 중, 핵심 장면만 뽑아 정리한 것이다. 아프리카 남수단에서 의료 봉사를 하던 신부가 48세에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난 지 10년 뒤, 어린 제자들이 성장하며 벌어진 기적을 감동적으로 조명한 다큐다. 이 영화를 만든 구수환 감독은 KBS의 <울지 마 톤즈>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이태석 신부의 삶을 세상에 알린다. 그 후 이태석 신부의 형인 이태영 신부와 함께 ‘이태석 재단’을 운영하였는데, 그 형마저도 2019년에 선종한다. 그가 죽기 전 “이태석 신부 선종 10주기에 영화를 만들어 달라”고 유언을 하는데, “그러겠습니다”라고 약속하게 된다. 


감독은 어떻게 영화를 만들까 고민하던 차에 남수단의 어린 제자들이 생각났다. 제자들을 수소문했더니, 놀랍게도 이태석 신부처럼 의사가 됐거나 의대에 다니는 제자들이 57명이나 달했다. 남수단의 작은 ‘톤즈’ 마을에서 국립대 의대생 57명이 나온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공무원, 대통령 경호원, 언론인까지 모두 70명의 제자를 찾을 수 있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아이들이 먹고살기 위해서 의사가 된 것이 아니라, 신부님 때문에 의사가 됐기에 신부님처럼 살아가겠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이태석 신부처럼 한센인 마을에 가서 봉사 진료를 하는데, 의사가 없는 주변 마을에서도 소식을 듣고 환자들이 찾아온다. 어느 환자는 “12년 만에 진료를 받았다”라고 한다. 제자들은 “신부님이 옆에 계신 것 같습니다. 신부님 일을 우리가 대신해서 너무 기쁩니다”라고 말한다. 이태석 신부의 사랑이 ‘부활’ 한 것이다. 


감독은 전편인 <울지 마 톤즈>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인가’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었는데, 이번 <부활>를 만들며 ‘아이들이 결국 이태석 신부 같은 삶을 사는 모습에 감격했다’고 한다. 이 영화에서 남수단 제자들이 ‘고향의 봄’을 연주하는 장면, 제자들이 한센인 마을에서 진료하는 모습, 제자들이 이태석 신부의 묘지 앞에 의사 자격증과 대학 졸업장을 올려놓고 통곡하는 모습을 보면서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이태석 신부의 다큐 영화 <부활>은 사랑으로 자란 아프리카 남수단 제자들의 이야기다.


<부활>을 본 후, 몇 해를 묵혔던 홍문택 신부의 책을 펼쳤다. 책에는 그의 약력이 나와 있다. 홍 신부는 1954년 부산 출생으로 가톨릭대학을 졸업하고 1982년에 사제품을 받고 길음동, 명동, 미아동, 고덕동 성당을 거쳐 가톨릭 평화방송 상무, 가톨릭출판사에서 사장을 역임했다. 그 후 두 군데 본당 주임을 지낸 후 2011년에 경기도 연천군에 저소득층 청소년들을 위한 <화요일 아침 예술학교>를 설립한다.


홍문택 신부는 우리 부부의 혼인 미사를 집전해 주었다. 그는 주례사에서 “여기 신부가 둘 있습니다. 한 사람은 곧 신랑의 아내가 될 신부이고, 또 다른 이는 앞으로 계속 혼자 살아가야 할 신부입니다.”하며 우스개 소리를 해서 다소 엄숙한 결혼식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홍 신부가 주례를 맡게 된 것은 아내가 명동성당에서 교리 공부할 때 담당 선생이었는데, 마침 우리가 그곳에서 결혼을 하게 되어 주례를 부탁했는데 흔쾌히 승낙해 주었다. 

그 후 아내와는 계속해서 안부를 주고받았고, 나도 언론을 통해 나름 동정을 꿰고 있었다. 그러다 우리 가족이 이민을 오면서 서로 연락이 끊겼다. 이력에서 보듯이 그는 정말 가톨릭 교회에서는 ‘잘 나가는 스타 신부’였는데, 엉뚱하게 사재를 털어 <화요일 아침 예술학교>를 설립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화요일 아침 예술학교>는 가난 때문에 미술가를 향한 꿈을 접어야 하는 여자고등학생들을 위해 만든 미술 전문 대안학교다. 예술학교’ 앞에 ‘화요일 아침’이라고 붙인 뜻은 종교를 갖지 않은 아이들에게도 문을 개방해주기 위해서고 또 하나는 ‘하늘에 나는 새도 먹을 것을 주시고 들에 핀 꽃도 예쁘게 피는데 왜 하물며 인간이 걱정이 많냐, 걱정은 오늘로 족하니 너희는 이로운 일을 하라’라는 뜻으로 학교 이름을 꽃 화(花) 자를 붙였다고 한다. 

<화요일 아침 예술학교>는 가난 때문에 미술가를 향한 꿈을 접어야 하는 여자고등학생들을 위해 홍문택 신부(사진 좌측)가 만든 미술 전문 대안학교이다.

한 학년에 정원이 13명, 고등학교 전교생이 39명이고 모두 기숙사 생활을 하는데 모든 비용이 무료다. 학생수에 비해 선생은 30여 명이 되어 어떤 해에는 학생보다 선생이 많을 때도 있다고 한다. 학교가 설립되고 3년 뒤, 고3 전원이 대학을 입학해 언론의 주목을 받는다. 


홍 신부는 언론 인터뷰에서 “우리는 대개 미술을 하면 대학 진학을 위해서, 전문 과목을 공부하는 것 같아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예를 들어서 그림을 잘 그리는 아이가 반찬을 차리고 음식을 차리고 상을 차렸을 때에도 ‘아, 예쁘구나’ 하면서 올릴 수 있다면 재료나 그릇이 훌륭한 게 아니더라도 예쁜 게 아니겠어요? <중략> 노을이 있어도 똑같은 노을이 한 번도 없잖아요. 하늘에 쳐져 있는 노을의 붉은색이나 파장, 그런 아름다운 것을 보고 그것을 자기 삶에서 행복하게 표현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미술 교육이 아닌가? 예능 교육이 아닌가? 저희는 꼭 미대를 진학하는 교육보다도 내가 3년 동안 여기서 살면서 내 인생을 어떻게 예쁘게 디자인할 수 있지? 그렇게 가르치는 것이 저희 학교의 가장 주된 목표라고 생각됩니다”라고 말한다. 나는 그 기사를 읽으며 ‘한국에 가게 되면 꼭 한번 찾아봐야지’ 했는데, 홍 신부는 그렇게 온몸을 바쳐 대안 학교의 꿈을 펼쳐 나가다가 2017년에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이 학교는 가톨릭 재단의 도움 없이 순수하게 회원들의 후원금으로 운영한다. 학교 설립 3년 만에 9천1백 명의 후원 회원이 모였다가 홍 신부가 떠나고 나서, 지금은 6천 명으로 줄어들었다. 후배 신부들이 돌아가며 운영을 하는데 학교 위치가 워낙 먼, 경기도 연천의 산 꼭대기라서 재능 기부를 하던 선생들도 초창기에 비해 많이 줄었다고 한다. 


홍문택 신부는 어렸을 때 화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는데, 가난했기에 미대를 가지 못했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가난 때문에 미술에 대한 꿈을 포기한 이들을 위한 대안학교를 만들려고 준비해 온 것이다. 어머니가 물려준 집과 자신의 30여 권 책에서 나오는 인세를 투자해 학교 부지를 구입한다. 후원금을 모으기 위해 지인들을 찾아가고 전국으로 강론을 다니던 중, 어느 통 큰 후원자의 도움을 받는다. 산골짜기에 학교를 지을 때의 고충은 안 봐도 그림이고, 그것이 죽음의 배후일 거라는 짐작이 든다. 그래도 그는 학생들에게 “어떤 역경이나 어려움 속에서도 꿈을 버리지 않으면 부활할 수 있다”며 항상 긍정적인 삶을 살라고 지도했다고 한다.  


마침 이 글을 쓰는 4월 27일이 홍문택 신부의 기일이고 화요일이다. “신부님! 아마 10여 년 뒤면 훌륭한 제자들이 학교로 돌아와 당신의 꿈을 이을 것이니, 염려는 잊으시고 천상에서 부디 영면하시기 바랍니다.” 


<부활>을 본 ‘화요일 아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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