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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순 Jan 04. 2020

짧고도 강렬한 이별

14개월의 마감 

어제는 그 날이었다. 

    어제였다. 미국 일터에서 사람들에게 "나 인제 이 일 그만합니다. 다른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를 말했다. 퇴근 10분을 남겨두고,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한 사람 한사람에게 악수를 나누었다. 어떤이와는 포옹도 했다. 나를 마지막으로 보는 파랗고 깊은 눈동자에서 잔잔한 미소를 느꼈다. 

    사실 이 날에 대해 머릿속으로 여러가지 시나리오를 굴려봤었다. 마지막 날이라고 음식이라도 사 가야 하나. 아니면 하다못해 빵이나 쿠키라도 사 갈까. 좀 구차해 보이기도 하고, 귀찮은 것도 있었다. 먼저 간 사람들의 흔적을 보면, 그들 역시 일을 그만둔다고 뭔가를 요란스럽게 하는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존경했던 A는 이 곳에서 십년 넘게 일했어도, 이순신 장군처럼 '나의 은퇴를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하며 조용히 떠나지 않았던가. 하하하. 그래, 이별은 짧고 굵은게 좋은거지. 이런 생각으로 나 역시 굳이 사람들에게 미리미리 말하진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어떤 이들은 나의 이같은 짧은 공지에 서운함을 비췄다. 

"야야, 너 스파이 아니야? 진짜로 빨리 가네!", 

"흥! 너가 조금만 더 일찍 말해줬어도 이렇게 슬프진 않았을꺼야. 왜이렇게 늦게 말해준거야!" 

뭔가 삐쳐있는 표정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카하. 내가 그래도 인생을, 일을 헛살진 않았나보다. 이렇게 나와의 헤어짐을 아쉬워해주는 동료들이 있다니...... 이보다 더 고마울 수가 또 있을까. 

    사실 일터야말로 처음에는 돈을 보고 오는 것이지, 사람을 보고 오는게 아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결론적으로 내가 받는 스트레스는 사람들로부터였다. 그러다보니 돈벌러 온 일터에서 중요한 건 사실 돈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그런데 일터는 취미활동 모임이 아니기에 온갖가지 군상의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기에 어떤 사람들이 나와 맞는지 안맞는지, 그건 일을 해봐야 안다. 또 당연하게도 나와 맞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그런데 그건 그냥 어쩔 수 없다. 다만 내 신조는 '적을 만들지는 않는다' 이다. 내가 모든이의 친구가 될수 없고, 그걸 바라는것도 욕심이다. 

    그런데도 나는 이렇게도 행운아였다. 지난 14개월동안 만났던 많은 사람들이 악의적이지 않았다. 크하! 나는 이게 제일 행운이 아닐까 싶다. 이런걸 인복이라고 하나...... 

    그래, 이 글을 읽는 내 전직장 동료들은 없겠지. 한국어를 읽을 줄 모르니 말이다. 그래도 나의 그들에 대한 기억이 생생할때 고마운 마음을 기록에 남기고 싶다. 실명을 쓰지 않고 가명처리를 해 본다. 


-토: 토씨와 일할때는 뭔가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마음이 편안하더라고요. 그런 차분한 성정을 갖고 있어서, 그래서 같이 일할 때 나도 덩달아 차분해질 수 있어서 고마웠습니다. 내 영어가 좀 유창했더라면 이렇게 잘 표현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그냥 고맙다고, 단순하게 말해서 그게 아쉬웠네요. 당신의 앞날에 희망이 가득하길!


-셀: 아, 셀. 셀의 '우-싸' 를 죽을 때까지 기억할 것 같아요. 왜냐하면 그건 정말로 인생에서 필요한 기술 같거든요. 당신과 함께 일하면서 나는 내가 뼛속까지 '빨리빨리'를 외치는 한국인임을 절감했고, 그게 일에서는 좋지 않다는 걸 당신이 부드럽게 알려줬습니다. '우-싸'. 마음이 급해지고, 조급해서 실수를 하지 않도록, 숨을 크게 내쉬는 연습. 우----싸. 기억할겁니다. :) 


-뉴: 하하, 우리 같이 교실에서 첫날부터 만나서 교육받고, 그래서인지 더욱 정이 갔던 너 뉴 하고 쥬. 내가 이 일 시작하고 이 주 훈련 끝나는 날 쪽팔리게도 엉엉 울면서 '나, 영어 못해서 너무 수업시간에 질문 많이 했어도 다 받아주고 이해해줘서 고마웠어.' 했던 날, 그런 나를 봐줬지. 하하하하하. 그리고 너는 뭔가 와일드 해 보이고, 욕도 잘하는것 같지만, 속마음은 누구보다 따듯한 사람이더라. 나랑 가위/바위/보 놀이도 해주고, 내가 한국식으로 가위 손모양 내민게 미국에선 총이라고 했던 것도 정말 좋은 추억이다. 넌 머리 회전이 빠르니 여기서도 살아남을 수 있고, 또 너가 원하는 더 좋은 곳으로 갈 수 있기를. 건투를 빌어! 


-안: 아아아. 안안안. 내 동료 중 손에 꼽을만한 '일터 밖에서 만난' 친구같고 동료같은 안. 어제 혹시나 너가 일터에 있지 않을까 했는데, 내 계산 착오기도 했고, 아무튼 마지막날 못봐서 아쉬웠네. 나를 훈련을 잘 시켜주고, 합격하도록 도와준거 안잊을겁니다. 참으로 고마웠습니다. 안, 너 역시 똘똘하고 또 손재주가 많으니 앞으로 좋은 일이 많기를 바랍니다. 잊지마, 그래도 너는 여기서 보금자리가 있잖니. 그래도 긍정의 힘을 믿기를! 


-린: 아, 은퇴를 92일 앞두고 있는 린님. 진짜로 린님과의 대화에서 많은 걸 배웠어요. 내가 늘 사춘기 십대처럼 방황을 하며, '이 일자리를 더 알아볼까. 여기는 어때?' 하며 더 나은 자리를 위한 일종의 '상담'을 했을 때, 육십대인 당신은 내 말에 귀기울여주고, 참말로 좋은 조언을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덕분에 영어도 많이 늘었지요. 하하하하. 또한 어제 마지막으로 내게 해 준말. '그래도 인제 마지막이니, (너의 이전 상사와) 좋게 인사하는게 결국 너를 위해서 좋을거야.' 그말도 선물처럼 고마웠습니다. 덕분에 내가 용기를 내서 내 전 상사에게 인사도 하고, 심지어 포옹!까지 했더니, 그 전의 서운한 마음, 미워했고 억울했던 마음도 훌훌 털어버리게 되어 린의 말대로 그것이 내 정신건강에 좋더군요. 이제 남은 삼개월 잘 마무리하시고, 좋은 RV끌고 미 전역을 여행하시옵소서. 참으로 안타까운건 린이 SNS를 안해서 연결이 안된다는 것이지만, 뭐 또 굳이 긴 집착은 하지 않기로...... 정말로 고마웠습니다. 


-님: 어제도 말했지만, 또 고마운 분이 여기도 있네요. 나도 모르게 일터에서 드라마의 한 가운데 있을 뻔했을때, 님이 내게 해 준 말들은 일종의 동아줄 같았습니다. 그 드라마 속에서 허우적거릴 때, 님의 조언에 힘을 얻고, 잘, 빠져나올 수 있었던것 같네요. 님의 인생에도 많은 빛들이 있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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