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이 반이다.
미국 워싱턴 주에 있는 우리 집 벽에 걸려있는 사진. 그 속에는 스무 명 남짓 되는 군부대 배우자들과 함께 내가 웃고 있다. 7년 전 미국 중부 오클라호마에 있는 반스 공군부대에서주는 장학금을 받는 자리에서 기념으로 찍은 사진이었다. 개나리와 진달래를 연상케하는 노란색 원피스에 분홍색 얇은 스웨터를 입은 나는 조금은 상기된 표정으로 웃고 있다. 미국에서 처음으로 벌어 본 돈이 이 장학금 이천불. 그것이 내 이민 생활의 첫 시작점이 될 줄은, 살아보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2013년에 나는 오클라호마의 작은 공원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법적으로 부부임을 증명하려면 제3자가 필요해서, 우리는 한국돈 5만원 정도인 50불을 주고 증인으로 목사를 고용하여 식을 치렀다. 그렇게 멋모르고 시작한 결혼과 이민 생활은 때로는 오클라호마의 토네이도처럼 우르르 쾅쾅대기도 했고, 때로는 워싱턴 주의 초록 산들처럼 푸른빛이 반짝반짝 윤이 나기도 했다.
되돌아보면 아무것도 아니고, 또 되돌아보면 모든 것은 지나갔다. 그럼에도 나는 마치 갑자기 험난한 군대에 들어온 사람처럼 이민자가 되어 정신을 무장했다. 뭔가를 이뤄야 할 것 같았고, 뭐라도 하지 않으면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의 선택들은 뭔가 정해진, 스텝 바이 스텝의 잘 짜여진 길은 아니었다. 내 첫 시작은 장학금이기도 했지만, 또 파트 타임 돈벌이를 위해 캐시어를 선택하기도 했다. 서점 캐시어로 잡무를 하고, 화장실 청소도 했다. 오랫동안 청소가 안된 변기 뒷면을 올렸을 때 갑자기 올라오는 역한 감정. 그것은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러한 역습의 순간은 나의 기억의 도서관에 콕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나는 꿋꿋이 닦는 내 모습도 사진처럼 인화해서 기억의 도서관에 걸어 두었다.
무엇이든지 처음이 어렵다고 한다. 나의 칠 년의 이민 생활. 나는 그 시작을 잘 지나왔을까? 아니면 아직도 나는 ‘시작’안에 머물러 있는가? 칠 년전 받은 이천불의 장학금으로 나는 다시 미국에서 학부 졸업을 했다. 한국에서의 국어국문학 석사 학위도 언젠가는 써 볼 수 있겠지 하는 바람을 마음 속에 품었지만, 이민은 만만치 않았다. 캐셔, 시험 감독관, 한국어 언어 테스터, 그리고 내 눈에는 꿈의 직장인 연방 공무원직까지 들어갔다. 철밥통이라는 단어만 믿고 들어갔는데, 막상 동료들을 사귀다보니, ‘빨리 다른 일을 찾아봐’가 그들의 진심 어린 조언이었다. 그 일은 다름아닌 공항에서 폭탄물이 있는지를 검사하는 보안원직이었다. 911테러를 겪은 미국은 보안 앞에서는 철두철미했다. 허벅지 위까지 옷 위를 스치는 것이지만, 처음 보는 사람의 신체를 만지는 일은 민망하다면 민망할 수 있는 일이었으나, 보안이라는 두 글자 앞에서 내 일은 진지하고도 육체적으로 피곤한 일이었다. 그 기간을 잘 버텼고, 책으로 배울 수 없는 영어를 배웠으며, 피부색을 뛰어넘는 우정을 얻기도 했다. 그 칠년 동안 남편과 나는 오클라호마에서 시작해 콜로라도와 워싱턴을 거쳤다. 지금 나는 캘리포니아에서 이 글을 쓴다.
내 이민의 칠년사. 나는 그 시작에 있는지, 아니면 시작을 떠나 중간 즈음에 있는지, 그것도 아니면 끝에 가까이 와 있는지, 아무것도 모른다. 모든 것은 끝이 나 봐야 아는 것이니까. 다만 그래도 내가 아는 것은 이날, 여기를 잘 살자는 것. 그러다 보면 또 알차게 산 하루들이 쌓여 무엇인가가 되어 있을 것이다. 일에 매몰되지 말며, 그 안에서 나를 지키며 나와 주변을 돌보자. 특히나 요즘처럼 코로나로 기댈 곳이 더욱 좁아지는 현실에서.
참. 내 이민 칠년의 시작점이 되어 준 기념비같은 이 사진 속에서, 내게 장학금을 선사해 준 분은 당시 중령이었는데, 지금은 별을 단 장군이란다. 아, 그렇다. 아는 이의 페이스북 문구처럼 ‘끝났다고 끝난 게 아니다.’ 뚜껑은 열어볼 일이고, 세상사 살아보면 누가 알리. 내 이민 살이,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할 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