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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순 Sep 30. 2021

연차를 낸 하루

미국에 사는 공무원 한인의 가을 하루 휴식

오늘은 일을 나가지 않은 연차를 쓴 하루였다.

연차이긴 연차였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던 대로, '원하는 대로' 이뤄진 연차는 아니었다.


나를 도운 것은 하늘. 구월을 이틀 남긴 오늘 하늘은 완연한 가을 하늘이다. 맑고, 따듯한 바람이 분다. 내가 원했던 '하루 연차'는 이런 멋진 가을 날, 멋진 브런치 식당에서 시작을 한다. 어렸을 적에도 난 꽤나 독립적인 인간이었는데, 혼자 미국 생활을 하는 이제 나는 사람들이 막 붐비는 시간대가 아니라면, 혼자 식당에 가서 밥도 먹을 수 있을 정도의 내공이 생겼다. 그래서 어제의 나는 '아, 내일 하루 연차쓰면, 혼자라도 아주 멋진 식당에 가서 브런치를 먹을거야.' 했다. 브.런.치. 영어를 한국어로 그대로 말할때에는 어떤 해방감과 허영심과 자유로움 같은 마음들이 담긴다. 아침도 아니고 점심도 아니고 아점도 아닌 '브런치'. 그런데 그 브런치의 꿈이 깨지고 말았다. 밖에 나가려고 차의 시동을 켠 순간, 그 노란색 불이 들어오고 말았다. 그것은 정확하게 말하면 노란색도 아니고 주황색에 가까운 노란 불빛이다. 가운데에 느낌표가 떡 하니 있고, 그 느낌표를 중심으로 둘레에 동그라미 혹은 괄호가 쳐져 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이 신호를 발견하면, 나도 모르게 자동반사처럼 눈이 똥그래지고, 머릿 속이 혼미해진다는 것이다. 나는 차 앞에서 가뜩이나 주눅이 들어 있는데, 이런 신호 앞에서는 그만 무릅이라고 꿇고 싶은 심정이다. 해외 살이 특히나 미국 살이에서 내 두 발처럼 중요한 자동차. 그 자동차에 문제가 있다는 신호다. 문제가 있는 차를 끌고 밖에 나가면 안된다. 그때 나의 뇌리에 들어오는 소리. 두둑! 혹은 빠박 하는 짧지만 단호하고 강력했던 그 소리!

그 소리는 어제 아침 일곱시 삼십분 즈음에 들려왔다. 매일 출근할때 들어가는 일터 주차장 입구에서였다. 입구에 들어서려는 그 순간 뭔가 바닥에서 어떤 이런 소리가 들렸다. 다시 머리에 전기불처럼 불이 팍 들어왔다! 문제다! 큰일이다! 이걸 어쩌나! 후다닥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려 바퀴 네 개를 둘러봤지만, 눈으로 확인할 길이 없다. 갑자기 바퀴에 구멍이 뻥 뚫려서 바퀴가 영화의 한 장면처럼 쪼로록 가라앉는 것도 아니고...... 다만 내 머릿 속에 그 소리만이 남았다. 그리고 약 이십 사시간이 지난 후 다시 차를 운행하려니 그 노란불이 들어왔고, 이 노란불은 내게 어제 아침 출근길에서의 그 소리를 기억나게 했다.

-그때, 내 차 바퀴가 뭔가를 밟은 게 틀림없어! 분명해!


아, 이걸 어쩌나. 원래는 은행원과 만나서 뭔가를 물어보려고 약속을 잡아놨는데...... 일단 그 은행원과 통화를 하고, 전화 상으로 볼 일을 봤다. 그리고 브런치는 개뿔, 일단 배는 채우고 차를 고쳐야 할 것 같아서, 냉장고를 두 번이나 열고 닫았지만, 제대로 먹을만한, 혹은 '내가 상상했던 브런치의 메뉴가 될 만한' 것들은 없었다. 차가운 흰 묵 (내가 추석 즈음에 오른손을 마구 휘저어, 가루를 고형으로 만들어 놓았다!), 달걀 하나, 오트밀 우유 팩, 쫄면, 냉면, 작은 파 한 단, 뭐 그런 것들만 눈에 들어왔다. 에이.... 폭망한 나의 연차. 벌써 오전 열한시에 가까웠다. 그래서 냉동실에서 어제 사 온 맛살을 끓는 물에 데쳤다. 봉지를 뜯어 맛살을 먹으며, 구글 지도로 tire exchange, auto repair 등으로 검색하니, 가장 집에서 가까운 곳이 보였다. 굿 이어. 좋은 해. Good Year. 미국인 남자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렸다. 예약은 필요 없소이다. 그냥 오이소.


우리 집에 딸려 있는 작은 창고 문을 열었다. 남편이 저 멀리, 돈 벌러 바다를 건너기 전, 이 창고 안을 잘 관리해 놓았다. 그러니까 높이 솟은 창고 안에 칸을 만들어서, 이 칸 위에 검은색 겨울용 타이어 네 개를 고이 모셔두고 간 것이다. 사다리를 펴 놓고,

-그래! 난 할 수 있어! (마치 최근 보는 원, 더우먼에서 배우 이하늬의 괄괄하고 성깔있고, 뭐든지 다 해낼것 같은 목소리로, 혼자 속으로 말했다.)

그래도 다치면 내가 고생하는것이니, 조심조심, 하는 마음으로 사다리가 안전하게 땅에 제대로 다 펴졌는지를 살피며 올라갔다. 그리고 타이어들을 꺼내들어 바닥으로 투투툭 굴렸다. 이 냄새나고, 무겁고, 커다란 타이어들을 차에 싣고 집에서 오 분 걸리는 그 곳에 도착했다.


그 곳에서 약 두 시간 후 다시 차를 끌고 나왔다. 나는 사실 이전 타이어, 그러니까 노란 불빛을 일으킨 타이어들을 도로 차에 싣고 와야 하는지, 아니면 그냥 버려 달라고 말해야 할지 답을 알지 못했다. 왜냐하면, 내 마음대로 그냥 버렸다가 그걸 아끼고 소중하게 모시려고 했을 수 있는 남편의 번개같은 불호령을 맞을 까봐 겁이 났기 때문이다. 이렇게 써 놓으니 마치 나의 남편을 오해할 수도 있겠지만, 그는 가끔, 아주 가아끔 이런 성질을 들이민다. 나 또한 화가 나면 눈을 부라리기도 하고, 목소리도 크게 낸다.

고백하건데, 결혼을 한 후, 이런 잡다한 '집, 차, 은행'과 관련된 (사실은 살아가면서 매우 중요한, 그럼에도 남편이 너무도 야무지게 알아서 척척 잘 해결해줘서 내가 제대로 알지 못했던) 일들은 모두 그의 몫이었다. 특히 차에 대해서는 내가 뭔가 끼어들 여지가 없을 정도로 그의 차에 대한 정보, 차에 대한 사랑은 차고도 넘친다. 어쨌거나, 나는 또 약간은 어눌한, 그러니까 외국인임이 티나는, 혹은 '내가 당신의 호구요 잡아 잡수쇼'와 같은 어리버리한 목소리로 그 남자 도날드씨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도날드는 이 '굿 이어' 데스크에서 일하는 남자다. 도날드는 키가 크고, 얼굴에 수염이 덥수룩하고, 가장 싸구려 하늘색 마스크로 턱스크를 하고, 앞으로 한없이 나온 배를 카운터 뒤에 숨겨놓고, 낡은 아이보리색과 먼지색이 섞인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그 티셔츠 아래에는 아마도 페이스 메이커(pace maker 심장 박동기)나 뭔가 내과 수술을 해서 배에 뭔가를 붙여 놓은 사람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그 할아버지한테 그러니까 나는 약 250불을 지불했다.

백인 도날드와 한인인 나의 대화는 한국어로 옮기면 대략 다음과 같다.

-아, 그러니까, 제가요. 차에 신호가 들어왔는데,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요, 아마도 바퀴에 나사 같은거 nail 그런게 들어가서 바람이 나오는것 같아요. I think, one of my tire is flat. Maybe.... I am not sure though.

-Which one? Which side of the tire? 그러니까 어느쪽 타이어가 문제란 말이야?

-(그걸 내가 정확하게 어떻게 알아?? 하지만 눈으로 대충 봤을때는 오른쪽 위야) I am not sure, but I think it might be top right one. But, can you check all of them?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오른쪽 위 바퀴 같은데, 만약 가능하면 다 볼 수 있어요?


아, 그런데 누가 그랬던가. 인생은 연극이라고. 그리고 우리는 리허설 없이, 그 무대에 바로 오르고, 연극은 진행이 된다. 그런데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사실은, 내가 대사를 한 개 한 개 잘못 칠 때마다, 그에 상응하는 값이 아주 제대로 매겨진다는 것을......!


내가 그 정비소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시간을 때우지 않기 위해서, 리디 북스로 열심히 책을 읽었지만 마치 치과에 온 듯한 드르륵 드르륵 거리는 기계음,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전화벨 소리, 그리고 도날드씨가 응답하는 소리, 혹은 도날드씨가 빨대로 음료수를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한 백인 아주머니가 '내 차는 혼다고, 몇 년에 산 거고, 몇 마일을 탔는데, 바퀴 좀 갈고 싶어. 비용이 얼마야?' '한 800불 정도 합니다' 이런 대화. 혹은 한 중국인 남성이 아주 낡은, 눈에 봐도 너무 낡은 것이 너무도 자명한 차를 끌고 와서, 강한 중국어 악센트로 '내 차에서 이런 드르르륵 드르르륵 하는 소리가 납니다. 그 원인을 밝혀 주세요' 라고 말을 했고, 그는 한 시간 후 다시 왔지만, 도날드씨는 '우리 정비원이 너 말대로 너 차에서 그런 소리가 나는건 확인했는데, 그의 능력으로는 원인을 찾을 수 없었어. 그러니까, 딜러샵에 가봐' 이런 별 쓰잘데기 없는, 도움이 하나도 안되는 답변을 들었지만, 도날드씨가 그에게 돈을 한 푼도 안 내도 된다라고 말을 해서인지, 중국인 남자는 너무도 감사하다는듯이, 고개만 숙이지 않았지, 쌩큐 베리 마치, 쌩큐 베리 마치! 를 연달아 큰 목소리로 말했다. '이봐요, 중국인 양반, 그대도 나처럼 '외국인이라 좀 빌빌거리는 자세'를 장착한 모양인데, 우리 어떻게 이 병을 좀 같이 고쳐봅시다. 허리 펴고! 당당하게 말이요!' 라고 속으로 연대의 목소리를 외쳤지만, 겉으로는 무심한척 했다. 그리고 그 중국인은 그 낡은 초록색 혼다를 끌고 사라졌다.


두 시간이 흘러서야 내 차가 나왔다. 도날드에게서 얻은 정보

-야, 그러니까 너의 차 타이어는 말이야, 가만 있어봐. 내가 직접 보고 말해줄게. 이 이전 타이어들은 약 70퍼센트 정도 썼다고 보면 돼. 그러니까 너가 그 타이어들을 다시 가져갈지, 아니면 여기에 버리고 갈지는 너가 결정하는 건데, 내가 너라면 그냥 안 가져갈 것 같아.


그런데 너의 새로운 이 윈터 타이어는 아주 상태가 좋아!' 이렇게 말해줬다. 나도 속으로 계산을 해 봐도, 내가 저 낡고, 오래되고, 냄새나고 크고, 시커먼 타이어 네 개를 다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창고에 올려놓을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 '낡고, 오래되고, 냄새나고, 크고 시커먼' 타이어와 방 한칸짜리 집 1 bedroom apt에서 동거를 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온 몸에 타이어 냄새가 베는것 같았다. 그래서 그냥 '뭐 남편한테 한소리 들으면 듣지 뭐. 지가 어쩔겨. 나는 여기 있는데! 남편은 쩌어기, 거어기에 있는데 말이다.' 그리고 결정적인건 이 모든 비용을 지불하는 자는 나다, 나. 이런 마음으로

-있잖아요. 써! Sir, I don't think I will take them back. You can throw them away. 그냥 타이어 버려주세요. 안 가져갈래요. 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그 타이어를 버려주는 값도 챙겨갔다. 그는 나의 이 타이어들을 다시 쓸까?


다시 차에 올라 시동을 켜니, 휴우...... 그 노란 불빛이 사라졌다. 도날드씨가 한 말중에는

-너의 오른쪽 위에 타이어에 뭐가 샌다. 안에 먼지가 많아서 아주 더러웠어."

정확하게 무엇이 샌다는것인지는 붙잡아두고 물어볼 수 없었지만, 결론은 이 노란불빛이 사라졌다는 거다. 그렇게 나의 연차의 절반이 지나가 버렸다. 그래도 나머지 시간들은 이렇게 도서관에 처음으로 와서 카드도 만들고, 브런치 글도 쓸 수 있게 되었다. 남편에게 영수증을 사진찍어 보내줬더니, 한 30불 정도 오버차지 overcharge 바가지 씌운 것 같다고 한다. 으으으으으...... 무대위에 올라간 댓가다.


아마 내가 오늘처럼 일을 하지 않으면, 한 이십년 정도 후에 은퇴를 한다면 나는 일상을 오늘처럼 채울 것 같다. 운동을 해서 체력을 키우고, 책을 읽고, 독서 모임을 하고, 글을 쓰는 삶을 '영위'하는 삶. 그런데 지금은 겨우 겨우 피곤에 쪄들어서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책을 읽고, 브런치 글을 자주 업데이트 할 수 없을 정도로, 일한다. 일만 한다. 아침 일곱시 이십분 쯤 나가서 오후 다섯시 정도에 퇴근한다. 정확하게 열시간이네. 이 일상에는 '저녁 시간'은 있는데, 저녁이 있는 삶은 아니다. 미국 일터라고 만만하지는 않다. 한국 일터에서보다 '일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은 것은 확실하고, '나이가 많다고 자를 수 있는' 환경이 아니라는 점이 장점이다. 그래도 미국 직장 역시 집에 오면 오징어가 되어, 설거지 하기가 귀찮아서 밥하기도 싫어지는 마음이 된다.


앞으론 되도록이면 무조건  달에 한번 정도는 이러한 연차를   줘야겠다.

가을 하늘, 20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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