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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순 Sep 15. 2021

IMHA

내 강아지는 산소 호흡기를 달고……

이런 일로 인생을 운운한다면 우스울 수도 있겠으나, 참, 인생이 한 장에서 다른 장(챕터)으로 넘어가는 건 정말로 순식간이더라. 순간이더라. 내게 그런 순간은 오늘 찾아왔다. 반갑지 않은 손님이었다. 


내 인생에서 이렇게 거대한 액수를 하룻동안, 그것도 아주 짧은 시간에 후루룩 써 버린 적이 얼마나 있을까. 이렇게 역사적인 날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며칠전부터 시어머님과 자주 통화를 했다. 평소에는 잘 안하던 통화였는데 이번에는 우리의 공동소유 보물이자 공동 보호 대상인 반려견 벨라 (시추) 문제였다. 

애가 통 밥을 안먹는다. 이게 웬일이니…… 한번은 핑크색 소변을 봤어…… 한번은 하도 못먹고 기운이 없어서 쳐져 있길래 내가 억지로라도 먹였어…… 결국 내가 이머전시 병원에 갔는데, 엑스레이 찍으면 비싸니까 피검사라도 받아보라고 거기에서 일하는 한국인을 만나서 그 사람이 또 말해줬단다.

어머님께서 사진으로 보내주신 벨라의 모습은 정말로 기운이 하나도 없이 축 쳐져 있었다. 그리고 오늘 예약한 병원에 가서 의사의 연락을 받았다.

 

적혈구 수치가 너무 낮다. 14이다. 당장 다른 병원으로 이송해야 한다. 우리 병원에서는 그런 장비가 되어 있지 않다. 


면역매개성 용혈성 빈혈 IMHA Immune Mediated Hemolytic Anemia 란다. 당연히 난 전화통화를 할 땐 무슨말인지 제대로 영어로 순식간에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국어로도 낯선 이 단어. 수혈 blood transfusion을 해야하고 삼일을 병원에서 돌봐야 하는데 그 비용이 나로선 천문학적 수치였다. 난 그냥 어이가 없었고 그대로 말했다.

 

-그 액수가 엄청난데 점 싸게는 안되나? 너가 이메일로 보낸 이 목록증에 불필요한 검사는 없나?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내가 너무 순진한 건진 몰라도) 진실하게 느껴졌다.


-우린 막 바가지 씌우고 그러지 않는다. 하지만 네가 이걸 승인 안하면 수혈을 못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그 금액이 너무 비싸서 그냥 put their dog down 저세상으로 개를 보내는 선택을 하기도 한다.


꼭 이런 중대한 사안을 결정할 순간에 그 인간, 남편이라는 작자는 쉽게 연락이 안되었다. 

그 역시 먹고 살려고, 일에 열 두시간씩 낮과 밤이 바뀐채로 매달여 있으니, 벨라의 사활 문제는 온전한 내 결정으로 남았다. 난 그냥 일단 수혈도 하고 치료를 시작하라고 했다. 당장 일을 해야 하는데, 수화기 너머로 '너의 결정이 없으면 우린 아무것도 할 수 없어'라고 말하고 있으니 내가 어떻게 그 순간에 과감하고 무모하고 잔인하게 '돈이 너무 비싸니까 안되겠어. 그냥 우리 강아지 이세상에서 고통 없이 가게 해 줘' 라고 말할 재간도, 그럴 용기도, 그리고 그것이 올바른 판단이라고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다만 나는 그냥 그 액수 앞에서는 좀 막막하기도 했지만, 또 솔직히 말하면 그냥 무덤덤하기도 했다. 그까이꺼. 뭣이 중한디...... 


대학원 한학기 등록금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어쩜 그렇게 이 세상은 돈으로 그 모든 인간의 마음을 촘촘이도 갈라 놓았는지 놀랍기만 했다.

 

만약 내게 그때, 그러니까 오늘 낮에, 시간적 여유가 더 있었고 고심할 여유가 있었다면 

-아, 그치료비가 욕나오게 비싸니까 그냥 천국 보내주세요. 라고 할수 있었을까? 단언컨대 노. 이겠지. 그만큼 나도, 시어머님도 (현재 벨라의 실제 식구는 시부모님이시다. 난 혼자 아파트에 살고, 내가 혼자 살면서 개를 키우려면 개가 하루 여덟시간을 혼자 집에 있어야 하는데 시부모님과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한다. ) 벨라에게 든 정이 너무 많았다.

지난 유월, 벨라를 만났을때 그녀의 모습. 2021. 벨라야, 힘내라. 이 애미가 여기에서 열심히 일해서 몇개월치 벌면 니 수술비 다 갚을 수 있다. 그러니 살아만 있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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