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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순 Jul 13. 2018

얼굴과 얼굴

[텍사스 중앙일보 문학칼럼 스무번 째 글] 

            그를 만난 것을 며칠 전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였다. 남편, 엄마와 여행을 하는 동안 우리끼리는 한국말을 하고, 현지인들과 의사소통을 할 때는 영어를 썼다. 그래서 스페인어가 공용어인 페루와 볼리비아에서 우리의 언어적 고립은 당연했다. 엄마는 현재 페루에서 코이카 한국어 봉사 단원으로 이 년째 살고 계신다. 작년에는 엄마와 마추피추를 보러 갔으며, 올 해에는 남편을 데리고 왔다. 이번에는 꼭 볼리비아의 우유니 소금 사막을 보고 싶었다. 사륜 기동 랜크루저를 타고 이 박 삼 일을 달리고 또 달렸다. 해발 고도 오천 미터가 되어는 소금 사막의 정상. 끝이 없는 하얀 소금 사막을 배경으로 한 사진은 나의 올 해의 사진으로 남게 되었다. 우유니 소금 사막 국립 공원 안에 있는 간헐천 온천에서 맞이하는 별 밤은 또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우수수 수많은 별들이 내 눈 안으로 후루룩 떨어질 것처럼 수없이 많은 별들… 이 아름다운 풍경들을 뒤로 하고 볼리비아의 라파즈와 우유니를 떠나와 다시 페루 리마로 돌아왔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눈과 마음에 담고 나니 몸이 요구하는 것은 ‘칼칼한 찌개’였다. 빨갛고 얼큰한 김치찌개 혹은 육개장이 몸 속에 들어가면 여행의 피곤함이 싹 가실 것 같았다. 


     페루의 수도 리마에는 K-POP의 영향 때문인지 한식당이 여러 개이고, 심지어 구시가지에는 한국 팥빙수만 파는 디저트 가게도 있었다. 신문과 잡지를 파는 가판대에는 한류 스타의 작고 잘생긴 얼굴이 보이기도 했다. 미국에 살지만 한인의 자부심이 퐁퐁 샘솟았다. 오랜만에 먹은 한식으로 배도 부르고, 여행도 후반부로 가고 있었기에 카메라에 채워진 메모리만큼이나 여행의 만족감이 커져 있었다. 자, 이제 택시를 타고 바다를 보러 가자, 라코마르로! 

        
      남편과 내 앞에 선 택시에 탔다. 운전기사는 우리를 흘끗 보더니 “치나, 치나?”랜다. 너 중국에서 왔니 라는 말일터. “노! 꼬레아 델 수르!” 아니요! 우리는 한국 사람인걸요! 정확하게 말하려면 ‘아니오, 나는 한국에서 태어나고 살았지만, 지금은 미국에서 살고있습니다.’ 인데, 스페인어로 이 긴 말을 어찌 번역하리오. 그냥 리마 현지인들의 눈에 아시안인 내가 중국, 일본, 한국 중 어느 나라 사람인지가 가장 궁금하겠지……. 그런데 택시 기사님의 반응이 놀라웠다. 그는 갑자기 유창한 한국어 발음을 구사했다. 
“오, 한국사람? 오, 노! 나빠요!” 
택시 기사분과 백미러를 통해 눈이 마주쳤다. 그의 얼굴은 가무잡잡하고 갈색 톤이었으며 눈이 크고 똘망똘망했고, 코와 입도 컸다. 얼굴에는 큰 눈만큼이나 주름도 굵게 여러개가 잡혀 있었다. 그저 ‘몇 분이면 나를 목적지로 데려다 줄 누군가’였던 이 기사분의 유창한 한국어로 인해 우리는 갑자기 이 분에게 큰 관심이 생겨 버렸다. 
“한국어를 왜 이렇게 잘하세요?”
“오우, 나 이천 이 년부터 오 년동안 한국에서 살았어.”
“하하하. 오 년씩이나요? 어디서 사셨는데요?”
“여기, 저기! 의정부, 경기도……”
“뭐하셨는데요? 팩토리?”
“양말 공장! 근데 나 한국에서 십 년 살았으면 돌아 버렸을거야!” 
그는 백미러를 통해 오른쪽 손가락을 빙빙 돌렸다. 
“사장님, 돈 주세요! 없어! 내일, 내일! 일해 지금! 사장님, 돈 주세요. 돈없어. 시이-발-놈아!” 
스페인어가 모국어인 이 택시 기사분의 입에서 나오는 한국어 욕은 위협적이지 않고 뭔가 우스꽝스러웠다. 아니, 그 상황 자체가 우스웠다. 약 십 육년전 한국의 양말 공장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일했던 이 페루 사람을 우리는 택시에서 만난 것이다. 그런데 기사 아저씨의 농담은 갈수록 더 해졌다. 
“난 너희들 중국 사람인줄 알고 태운거야. 한국인이라는 거 알았으면 안태웠어. 노노! 코레아노 노노! 하하하하하.”
“한국에서 돈은 많이 벌었어요?”
“오, 노. 한달에 팔십 만원! 근데 잘 안줬어. 사장님 돈 주세요. 시-이 발놈아, 일해! 사장님 소주 많이 먹어.” 
앰 아이 어 굿 조커? 내가 농담을 잘하지? 그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16년이 지난 지금 그가 기억하는 한국말은 대부분이 욕이었다. 지금은 그 말들이 중국인으로 보이는 한국인 손님에게 농담으로 하는 말이지만, 16년 전 양말 공장에서 그가 경험한 서러움, 눈물, 고통은 내가 농담 삼을 수 없는 것 일터이다. 왠지 나는 그에게 미안함과 부끄러움을 느꼈다. 

        남미를 여행하면서 내가 그의 얼굴을 맞이하고 이러한 이야기를 들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살면서 우리는 참으로 계획하지 못했고, 예상하지 못했던 ‘만남’을 한다. 이 넓고도 좁은 세상에서 내가 당신을 언제 어디서 다시 만날 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존중하며 친절히 대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링크: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6252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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