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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순 Jul 13. 2018

우리들의 말하기

[텍사스 중앙일보 문학칼럼 열 아홉번째 글]

이 글은 텍사스 중앙일보에 발행된 제 문학칼럼 글입니다. 


            한국을 떠나있는 동안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이야기들이 한국에서 펼쳐졌다. 몸은 태평양 건너에 있지만 온 마음이 한국에서의 현실 드라마에 눈을 떼지 못했다. 매일 8시간씩 학교에서 처음 보는 아이들을 만나고, ‘조용히 해라’를 수백 번 외치다 보면 집에 돌아와서는 녹초가 된다. 그래서 이른 저녁부터 침대에 누워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갑자기 남편이 거실에서 급하게 나를 부른다. “빨리 나와봐, 빨리!”

         그렇게 나갔더니 텔레비전 CNN방송에서 남한과 북한 두 지도자의 만남이 이뤄지고 있었다. 유튜브로 들어가 ‘실시간’이라는 한 단어를 쳤더니 똑같은 방송이 나왔다. 상징적이고도 역사적인 만남이 이뤄지는 장면을 보고 있자니 괜히 눈물도 쭈루룩 나온다. 새소리로 덮인 남한과 북한 지도자의 대화가 무성영화처럼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다만 두 사람 사이에는 통역관이 필요 없다는 것도 참으로 인상적이다. 

     이틀 동안 한국 뉴스도 다시 챙겨보았다. 한 두 번 반복해서 보다 보니 감동의 눈물을 닦고 두 지도자들의 목소리가 더욱 생생하게 들려왔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북한 지도자의 목소리를 생애 처음으로 들었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니 그의 얼굴은 미국은 물론 페루를 여행할 때에도 가판대 신문 일면에서도 볼 수 있었지만, 그의 목소리를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남한과 북한 정상 모두 뛰어난 말하기 능력을 지닌 것 같았다. 지도자들의 말하기 기술에 대해 생각이 들자, 교사로서 미국의 학생들과 한국의 학생들의 말하기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졌다. 

     80년대 생인 나는 ‘국민학교’가 아닌 ‘초등학교’를 나왔지만 어른이 아닌 아이이고 남자가 아닌 여자로서 내가 교육받은 방식은 주로 ‘듣기’위주였다. 선생님과 어른들의 말씀을 잘 듣고 그에 따르는 학생. 그런데 미국에 와서 교실에서 아이들에게 ‘이 질문에 답해 볼 사람!’ 라고 물으면 말그대로 너나없이 여기저기서 손을 드는 아이들의 모습이 흔하다. 심지어 정확한 답을 알지 못하더라도 일단은 손을 들고 보는 아이들도 꽤 있다. 일단 내 답이 맞는지 틀린 지 확신이 서지 않지만 손을 들고 보는 것. 그 아이들에게서는 쭈뼛거림이 없다. 무조건 정답을 맞춰야 하는 강박도 없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배우고 싶은 자세이기도 하다. 

     인생에 완벽한 정답은 없다. 내가 스스로 생각하고 따져 본 그래서 따르고 싶은 나 만의 인생의 목표와 지향점이 있다면 오케이다. 그리고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그러한 나만의 고유한 생각을 ‘말하기’를 통해 표현하고 공유할 수 있다면 이는 더더욱 오케이가 아닐까. 또한 우리 모두는 각자의 입장과 생각이 있기에 이를 잘, 제대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각 나라의 경제적, 정치적 입장 차이가 있듯이 개인에게도 그러한 차이가 존재한다. 그 차이를 확인하는 길이 일단은 말하기 혹은 소통하기에서 출발하지 않나 싶다. 

     나의 이민 생활에서 소박하면서도 이상적인 꿈이 있다면 ‘말하기’를 자유롭게 할 수 있으면서도 상대방을 존중할 수 있는 ‘듣기’를 병행하는 한인 커뮤니티를 가져 보는 것이다. 한국어, 영어 둘 중 자신이 편한 언어를 선택해 정해진 시간 내에 발언을 해 본다. 그 내용이 어찌 되었든 함부로 판단하지 말 것이 규칙이다. 그렇게 표현을 하고 소통을 한다면 고단한 이민 생활의 활력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발행일: 2018년 5월 4일 

링크: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61698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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