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캐셔로 일하기 1
오클라호마 이니드. 내 신혼 일기가 쓰여진 곳. 인구 3만의 이 소도시에 서점이 한 곳 있었다. Hastings라는 프랜차이즈 서점이다. 지금은 이 곳이 망해서 없어졌다. 나는 이 곳에서 딱 삼 개월 버텼다. 2013년 말 11월에서 2014년 2월 정도까지였다. 그 후로도 여러가지 일들을 해 보았는데, 이 일처럼 강한 인상을 준 일도 없다.
첫 일터에 가기 전까지
미국에서 결혼은 했고, 이제 일을 해야 하겠는데 그처럼 막막한 적도 없었다. 한국에서 가져온 이력서와 석사 졸업장이 이토록 무용지물이 될 줄도 몰랐다.
"어머어머, 소현씨가 모르나 본데, 미국에 이민온 한국사람들 중에 제-일 꼴불견이 바로 나 어느 대학 나왔네~하고 자랑질하는 사람이야. 여긴 미국이라고. 한국 석사 박사? 서울대 연고대? 다 필요 없어."
우연히 이니드에서 알게된 한국인분과의 짧은 커피대화에서 이런 말을 들었다. 그 말은 살면 살수록 가끔씩 혹은 때때로 내 머릿속에 에밀레의 종소리처럼 울려댔다. 현실을 마주하기 전 한국에서의 내 모습은 희망 가득한 새싹같은 아동의 순수한 얼굴 같았다. '미국에 간다'는 말을 했을 때, 대학원 선배들과의 대화에서 나는 무척이나 당당하고 씩씩하게 웃으면서 "전 화장실 청소도 할 준비가 되었는걸요!" 라고 말했었다. 당시 정말로 내게 그런 포부가 있었다 하더라고, 막상 현실로 닥쳐 벌판 같은 미국 소도시에서 화장실 청소를 한다는 것이 내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어떤 기분일지에 대해서는 경험해본 자만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그렇게 무모했기에 여기까지 날아오고 이민자가 되는 것이 가능했을지도 모르겠다. 내 결혼과 그로 인한 이민의 시작은 그 무모함에서 출발한다. 그렇다. 이민 가려면 한 스푼의 무모함이 필요하다.
서점 캐셔라는 일
이 곳은 서점이면서 게임도 팔고, 디브디도 대여해 주고, 또 작은 커피숍도 딸려 있었다. 직원을 구한다는 광고에는 커피숍 바리스타를 뽑는다고 써 있어서, '그래? 그럼 커피 만드는 기술도 배울겸 지원해보자!'는 마음으로 지원했다. 면접을 보고, 일을 시작하라는 연락을 받았을 때, 나는 너무도 기뻐서 날뛰었다. 그때 옆에 있었던 남편과 버마에서 온 친구에게 함박웃음을 벙벙 날렸다. 내 미국 일터에서의 상사는 릴리다. (사실 그녀의 진짜 이름은 릴리가 아니다. 기억도 나지 않거니와 가명이 더 편하다.) 뽀얗고 하얀 아기 피부를 가진 그녀는 짧은 금발머리에 푸른 눈동자가 조금은 특별한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서점에 딸린 커피숍 바리스타를 뽑는데, 인터뷰 질문들은 일에 비해 상당히 진지했던 것 같다. '이러이러한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하겠느냐?' 와 같은 open end questions이었다.
막상 일 자체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현금 계산원이기 때문에 계산대에서 손님 맞이하고 계산해 주기, 손님들이 대여한 뒤 반납한 디브디를 다시 수거함에서 꺼내오는 일. 그 디브이디들을 다시 투명 플라스틱 케이스에 집어 넣는 일. 서점에 있던 각종 소소한 기계들, 예컨대 팝콘 기계에 팝콘 만들어 놓기, 냉장고의 각종 음료수들을 채워 넣기, 이러한 노동은 나를 피곤에 절게 만들었다. 또한 현금 계산원 아르바이트는 풀타임이 아니었기에 일하는 요일과 시간이 들쭉 날쭉이었다. 일 주일 전에야 매장 매니저가 내 일정을 짜 놓고 그때가 되서야 내가 알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일을 하다보니 머릿속에는 '아니, 바리스타로 일하게 해 주겠다면서 왜 현금 계산원만 쭉 시키는거야?' 라는 질문이 떠나지 않았다. 이 질문을 릴리에게 안 한건 아니었다. 그녀는 내게 '너가 아직 여기에 익숙하지 않으니 먼저 캐셔를 해 본 다음 바리스타로 바꿔줄게'라고 말했다. 별 수 있나, 수긍하는 수 밖에......
은따아닌 은따 혹은 부적응
이 모든 것들을 떠나 가장 힘들었던 것은 아무래도 사람들이 모여있다 보니, 그 사이의 보이지 않는 감정들과 무시 등의 부정적인 에너지였다. 또한 그 곳의 척박함, 인종적 문화적 다양성의 불모지라는 점은 내 삶을 더욱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오클라호마 주 이니드 시에 아시안은 0.1프로나 될까? 서점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스무 명 남짓한 이들 중 한 명이 네이티브 아메리칸이었고 모두가 백인이었다. 이들과의 수다가 쉽지 않았다. 또한 당시 내 눈에 사람들은 일은 안하고 수다만 떠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그 수다의 그룹에 포함되지 못했으며, 그들과 나 사이의 언어 와 문화 장벽은 생각보다 높고 험했다.
그들이 쓰는 생활 영어는 내가 한국에서 교과서에서 배운 영어와 달랐다. 언어는 어디에서 나오는가 문화와 삶이다. 나와 그들은 한 공간에 있었지만 우리가 서로 처한 문화와 환경은 무척이나 달랐던 모양이다. 그래서 였을까. 한 번은 내가 손님들이 오지 않았을때, 혼자서 영어 스피치 연습을 하고 있었다. 스피치 모임에 나가고 있었기에, 연습을 하는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 멀리서 그나마 나와 가깝게지냈던 남자 모건이 다가오더니 슬쩍 질문을 던졌다. "혹시 너 지금 계속 혼잣말 하는거야?" 이 말을 하는 그의 눈빛에는 '너 괜찮아? 약간 좀 이상한 거 아니야? 혹시 정신 질환이 있는거야?' 등 상당한 의심과 우려가 섞여 있었다. 한마디로 나를 약간 또라이로 본 모양이다. "아하하하하하, 나 지금 뭐 스피치 할 게 있어서 그거 연습하는거야." 그 후로 나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선 절대로 혼자 스피치 연습을 하지 않는다. 안그래도 말을 잘 못알아 먹어서 애를 먹는데, 이상한 행동을 하면 더 오해 받을 수 있으니 말이다.
이같은 나의 아르바이트 생활은 흑역사로 점철되어 있다. 여기에서 말하지 않은 결정적인 사건들도 몇가지 있다. 기회가 된다면 다음 편에...... 다만 이 흑역사같은 삼개월은 내게 일종의 필수 교과목 같은 과정이 아니었을까 싶다. 전공 수업을 듣기 위해 반드시 들어야만 하는 수업같은 경험. 남편이 벌어오는 돈으로 집에서만 있었다면 알지 못했을 내가 겪은 현실세계. 그것은 피곤함이었고, 또 다른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갑갑함이었으며, 결코 이민인의 삶은 만만한 게 아니라는 것을 '맛보기'로 알려준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