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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순 Mar 09. 2019

타라 웨스트오버 Tara Westover

책 "Educated" 교육받은 

제목을 생각한다. 교육받은. '먹물'의 의미는 뭘까  

    실물로 보면 꽤나 두꺼운 이 책 "Educated". '교육받은'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듯 하다. 교육받은 사람. '먹물'이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해 본다. 자기 힘으로 생각하고, 쓰고, 거기에 더불어 공식적으로 그러한 힘을 인정받는 학위를 받았다는 것. 그것이 교육의 다른 말이다. 사실 인문학을 전공하고 미국에서 공무원으로 겨우 자리를 잡은 내게 이 '교육'이라는 말처럼 중요하면서도 또 조금은 사치스럽게 느껴지는 단어가 있을까. 내 힘으로 생각하고, 문장을 읽어나가고, 내 문장을 만들어내는 일처럼 인간다운 일이 또 있을까? 먹물의 힘은 대단하다. 먹물은 자기 치유의 힘을 갖고 있다. 내게 어떤 일이 일어났고, 그 일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고, 또 그 해석이 시간의 변화에 따라 어떻게 바뀌어가는 지를 기술하는 것만으로도 치유가 될 수 있다. 혹은 그것이 굳이 문장이라는 글이 아닌 말이라도 카운슬링 상담을 통해서도 가능하다. (타라 웨스트오버 역시 반복되는 상담의 힘을 책에 써 놓았다.) 

    굳이 미국이 아니라도, 자본이 모든것을 대신할 수 있는 상황에 '돈 안되는것 같아 보이는' 책읽고 독후감쓰기는 사치처럼 들린다. 하지만 나의 내적 힘을 키우는데 이처럼 양식이 되는 일이 또 있을까. 읽고 쓰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자.  


#다 읽었다. 그런데 다시 읽자.

오디블로 일단은 한 번 읽었다. Audible은 가장 빨리 한 권의 책을 끝낼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지만, 그것만 믿으면 안된다. 다시 읽을 필요가 있다. 누군가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책이 아닌 내 눈으로 문장을 읽어야 나의 영-독 실력도 늘지 않을까. 어쨌거나, 그래도 끝을 냈다. 눈물이 살짝 날것 같기도 하고, 먹먹하기도 하다. 사실 내가 이 실화에 근거한 책을 읽으면서 가장 속으로 궁금했던 것은 '작가의 부모님이 살아계실까?'였다. 내심 '아마 돌아가셨겠지? 그러니까 이렇게 적나라할 정도로 솔직하게, 아무런 거리낌 없이 쓸 수 있지 않았을까?'였다. 그만큼 이 책은 일종의 고발자 역할을 한다. 저자 자신은 스스로의 삶 그리고 거기에 깊이 '연루'된 가족에 대해 거름망 없이 그대로 써 내려갔다. 그렇기에 더욱 놀랍고, 또 스캔달스러우며, 또 그만큼 저자의 솔직함, 용감함, 대담함에 감탄이 나온다. 그 솔직함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래, 나 이렇게 살았어. 우리 가족은 이런 좀 기괴한 행동들을 했었지. 심지어 내 오빠가 내게 어떤 짓을 저질렀는 줄 알아?' 라고 소리를 지르는듯한 절규의 모습으로 이 책을 썼을지도 모른다. 그 너머에는 '그럼에도 내가 이렇게 그 모든 것들을 이렇게 기술할 수 있는 힘이 있고 그 힘으로 나 스스로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 나갈 수 있는건 내가 받은 교육 때문일지도 몰라.' 라고 저자가 조용히 말하고 있는것 같다. 


#불안한 초반부, 뭔가 부러웠던 중반부, 아픔이 남아있는 후반부 

    한 권의 책은 한 사람의 인생 전부를 요약할 수 있을까?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이 정도의 두꺼운 책이라면 아마도 저자의 모든 인생이 요약, 정리될 수 있을거라는 착각을 했다. 한 사람의 인생은 한 권의 책에 요약 정리될 수 없다. 대신 이 책은 이 두꺼운 책을 통해 자신의 삶, 그것도 아프면서도 내밀한 부분들을 속속들이 거침없이 보여주면서, 그 속에서 저자의 마음상태와 성찰이 담긴 문장들을 함께 보여준다. 가장 이 책에서 내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생존자의 의식'이었다. 저자는 자신의 큰오빠가 그녀에게 언어적 신체적 학대를 습관적으로 가했는데, 그러한 '누군가의 구조'가 필요한 상황에서 그녀가 생존자로서 생각해야 했던 부분은 '난 괜찮다.' 였다. 사실은 괜찮지 않았음에도 그 상황에서 살아남으려면 그렇게 자기 암시를 해야 했다. 아래 인용구는 큰오빠인 숀Shawn이 주인공에게 물리적 폭력을 가한 후, 그녀의 방에 와서 '우리가 아까 했던건 장난이었어.'라고 말하고 방을 나선 뒤를 기술한 부분이다. 

He leaves. I return to my journal. Was it really fun and games? I write. Could he not tell he was hurting me? I don’t know. I just don’t know. 

I begin to reason with myself, to doubt whether I had spoken clearly: what had I whispered and what had I screamed? I decide that if I had asked differently, been more calm, he would have stopped. I write this until I believe it, which doesn’t take long because I want to believe it. It’s comforting to think the defect is mine, because that means it is under my power. 

Kindle page 195


(본인 번역) 그가 떠났다. 나는 다시 내 일기를 쓴다. 그것은 정말로 재미였고 장난아었나? 라고 나는 쓴다. 오빠는 자신이 내게 상처를 주는게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었나? 난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나는 스스로를 합리화하기 시작했다. 명확하게 썼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뭐라고 속삭였고, 뭐라고 (오빠에게) 소리쳤지? 만약 내가 좀 더 차분하게, 다른 방식으로 오빠에게 말했다면 오빠는 당장 멈췄을거야. 나는 내가 이 말을 스스로 믿을 때까지 쓴다. 나는 이 말을 믿고 싶었기에 이 말을 쓰는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내게 결함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편했다. 왜냐하면 그렇게 생각하면 (결함은 오빠가 아닌 내게 있으니 이 문제가) 내 통제 아래에 있는 것이 되니 말이다. 


    가해자인 숀Shawn 의 악행을 막을 사람은 아버지였다. 그는 Bipolar 조울증 성향이 있으며 극단적인 종교적 믿음을 가진 사람이다. 그는 아들을 치료하거나 개선시키기는 커녕, 오히려 숀의 행동을 고발한 다른 자녀들에게 '증거 없으면 말하지 마라'라는 식으로 오히려 숀을 감싸고 돌면서 상황을 비극으로 만들어갔다. 이 책의 초반부는 저자의 아버지가 지닌 잘못된 신앙적 믿음으로 인한 자녀들의 무교육, 병원과 정부 불신에서 시작되어 숀의 등장으로 악화된다. 집 밖에서 반항아로 살다 집으로 돌아온 숀은 여동생인 저자와 다른 동생들에게도 악행을 서슴치 않았다. 이 모든 상황에서 저자를 빠져나오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교육이었다. 그녀는 혼자 GED를 공부해 BYU 대학교에 들어가고, 그 곳에서 다시 장학금을 받아 영국 캠브리지에서 역사학을 전공하고, 하버드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까지 받게 된다. 학구열을 불태울 수 있었던 꽤나 행복해 보였던 그 시절에도 초반에는 그녀가 적응하는데 시간이 필요했다. 영국 캠브리지 대학에서 촛불을 켜고 저녁 식사를 하며, 전세계적 석학들과 함께 식사를 하며 토론에 열을 띄우는 어떤 삶의 불꽃같은 순간을 가져야 함에도 그녀는 '내가 정말로 여기에 소속된 사람이 맞을까? 어쩌면 나는 서빙을 하고 있어야 그게 나한테 더 적합한것 아닐까?' 이런 자아 존중감이 없는 모습을 보인다. 아마도 그것은 어쩌면 '부모님이 나를 무한하게 사랑해 준 기억'이 없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보통의 세상 사람들'과 동떨어진 삶: 제대로 된 출생 신고서도 없고, 공립 학교에는 문턱에도 가 보지 못했으며, 초중고등학교 교실에서 교육을 받은적이 없고, 여성과 남성에 대한 뚜렷한 이분법 속에 갇혀 여성의 신체 일부 (예컨대 어깨)를 보이는 것으로도 성적 수치심을 겪는 아이다호 산골 Buck's Peak 출신이라 캠브리지라는 새롭고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한 과정이었을까? 그 답은 명확히 모르겠으나, 이 부분을 읽을 때는 참으로 슬펐다. 말그대로 가장 아름다운 삶의 한 순간에도 주인공은 자신이 그 무대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셈이 되었으니 말이다. 삶의 어떤 순간에 있건, 스스로를 아끼고 사랑할 줄 아는 마음을 가질 것. 주인공은 다시 '현대 여성'이 되기 위해서 '교육'이라는 터널을 통과해야 했다. 그 터널 속에서 그녀는 서구 여성운동을 접하고, 서구 고전 철학을 만나기도 한다. 이 교육이라는 터널이 없었다면 그녀는 자신의 자매와 비슷한 삶을 살았을것이라고 고백한다. 

   이 책의 후반부가 아픔이 남아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대부분의 문제들이 책의 마지막을 덮을 때까지 해결되지 않고 그대로 있기 때문이다. 그 문제들은 어쩌면 영원히 치유될 수 없는 문제로 보이기도 한다. 삶을 바라 보는 가치관의 차이와 그로 인한 갈등. 내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바로 가치관, 신념, 종교관에 기반해 있다. 그런데 그 뿌리같은 가치관이 가족 내에서 서로 상반되거나 양립 불가능한 상태로 보일 정도로 적대적이라면 비극이다. 저자는 수년 전 자신의 아버지와 대화를 중단했고, 그 이후로 고향에 갈 때마다 어머니에게 연락해 '엄마를 만나고 싶다'고 연락을 취하지만 그녀의 어머니는 '딸아, 너가 아버지와 대화를 시작하지 않는다면 나는 너를 따로 만날 수 없다.'는 답만 취한다고 한다. 주인공은 이런 상태가 되기 전, 자신의 가족을 다시 되찾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 방식은 유일한 '아버지의 방식'을 따라야 하는 것이었고, 그렇지 않다면 그녀는 그 가족 안에서 '배신자, 마녀'로 취급되었다. 


    모든 가족에는 각각의 고유한 문제가 있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이는 당연해 보인다. 그래서 가족이라는 주제는 인류의 주제이기도 하다. 이 책은 내게 '아니, 요즘같은 세상에 정말 이런 사람이 그것도 선진국이라고 불리는 미국에서 살았고, 동시대를 함께 살고 있단 말이야?'라는 일종의 지나친 놀라움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읽을수록 우리 모두가 안고 있는 '가족'이라는 주제, 그 안에서의 갈등을 이야기하고 있어서 '너무나도 낯설어 보였던' 저자의 이야기가 '조금은 극단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결국엔 사람간의 갈등 가족의 문제'를 다루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어쩌면 저자는 5년 혹은 10년이 지난 후 이 속편에 대해서 쓸 지도 모르겠다. 그때 또 찾아보고 싶다. 


밑줄 그은 부분들 

My life was narrated for my by others. Their voices were forceful, emphatic, absolute. It had never occurred to me that my voice might be as strong as others.  

내 삶은 다른이들에 의해 말해졌다. 그들의 목소리는 강력하고 확실하며 절대적이었다. 내 목소리가 그들의 목소리만큼 강하다고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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