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백수매거진#25] 헤르만헤세가 사랑한 백수 <크눌프>

#자발적백수라이프

by 달숲

헤세의 글을 처음 접한 것은 <데미안>을 통해서였다. 오래된 일이다. 워낙 이름있는 작가이기에 호기심이 생겨 서점을 방문했었다. 그러나 <데미안>을 위한 목적성 방문이었음에도 서점에 머무르는 시간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당시 펼쳐본 <데미안>은 편한 마음으로 읽을 수 있는 문학작품이라기보다는 난해함과 근엄함으로 가득한 책이었다. 참새가 어찌 봉황이 뜻을 알겠는가. 살포시 책을 제자리에 놓고 온 그날 헤세와는 영영 이별인줄알았는데. 헤어짐이 있으면 만남이 있다고했는가. 우연찮게 <싯다르타>를 읽고 헤세에게 별안간 흥미가 생겼다. 리고 작가의 다른 책을 읽어보기로 마음 먹었다.


그러나 역시 <데미안>은 아직 도전해볼 엄두가 나질않않다. 헤세의 집필 목록을 읽어 내려가다 시선을 사로잡은 책, 바로 <크눌프>이다.


http://www.yes24.com/Product/Goods/1440642?scode=029


독자리뷰를 보아하니 방랑자 크눌프의 '자발적 백수 라이프'를 그려낸 책인것 같았다. 백수는 서로를 알아본다 하였는가. 망설임 없이 바로 구매를 확정하였다. 책을 읽다보니 크눌프는 헤르만 헤세가 그려낸 사랑스런 백수이자 어쩌면 작가가 꿈꿔온 분신이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크눌프> 줄거리

사회가 정해놓은 길을 걷지 않는 크눌프는 일반 사람들과 다르지만, 늘 사람들의 삶 속에 녹아있다. 타고난 천성을 거부하지 않고 자연의 물결에 몸을 맡긴채 살아가는 크눌프는 자유롭고 빛이 난다. 어딜가든 환영받는 그는 발길이 이끄는대로 삶을 이어나간다. 목적없이 걷다가 멈춘 마을에는 언제나 자신을 사랑하는 친구들이 그를 환대하며 방을 내어준다. 심지어 무두장이 친구의 부인까지 매혹시키는 크눌프는 특유의 재치과 민첩함으로 불편한 상황을 유연하게 빠져나간다.


그는 가치관이 다른 사람들에게, 심지어 자신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화를내거나 날은 세워 응수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의 뜻을 굽히지도 않는다. 그는 분란을 일으키지는 않으나 설득되지도 않는 흥미로운 인물이다.


친구들은 크눌프에게 무엇 일이든 당장 시작하고 가정을 이루어 평범하고 소박하게 살 것을 권유하지만 크눌프는 사랑스러운 친구들의 조언을 솜씨좋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린다. 가끔은 좋은 의도의 배려가 상대방에게는 되려 폭력이 될 수도 있다. 다소 불편한 상황에도 지혜로운 크눌프는 현명하게 대처해나간다. 헤세가 그려낸 크눌프는 영리하고 따뜻한 사람이다.


그런 크눌프도 죽음을 앞둔 말년에는 신을 원망한다. 자신의 삶이 어느곳에도 뿌리내리지 못하였음을 뒤늦게 후회하는 대목을 읽으며 모든 선택에는 책임져야할 일정한 몫이 있음을 곱씹었다.


내면의 목소리를 철저히 무시한 채
사회에서 주어지는 가이드라인을 따라
평범하고 안정적으로 살다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본능을 끌어안고 자유롭게 살아가다
쓸쓸하게 혼자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헤세는 어떠한 답도 알려주지 않고 단지 생각해볼만한 상황을 독자에게 툭 던져줄뿐이다.


크눌프는 신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삶이 헛되지 않았음을 깨닫고 쌓여가는 눈 속에서 고요히 죽는다. 소설은 그렇게 끝이 난다.


헤세는 어쩌면 '각자 생긴대로 사는 것이야말로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다.'를 말하면서도, '각자의 삶을 자신의 방식으로 살아나가는 모두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배려하며 살아나가야한다.'를 독자에게 속삭이고 싶었던게 아닐까.


자연을 아릅답게 묘사한 부분이 많아 읽는 내내 즐거웠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집에 머물러 있지만 글을 읽으며 드넒은 자연 속에 다정한 크눌프와 함께 한 기분이 들었다. 짧은 여행을 끝마친 상쾌한 기분. 코로나가 잠잠해지면 짧게나마 국내여행을 다녀오고 싶다.


좋은 구절이 많아 책 귀퉁이를 접어가며 읽었는데 다 읽고나니 접은 곳이 꽤 많았다. 좋았던 구절들을 함께하고 싶다.

밑줄 그은 문장들

p.36

이보게, 재단사 친구, 자넨 성경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어. 무엇이 진리인지, 인생이 본래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지는 각자가 스스로 깨달아야 하는 것이지 결코 어떤 책에서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일세.


p.51

어쩌면 무두장이 친구에게 부인에 대한 주의를 주어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사람들의 문제에 끼어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이 더 나아지거나 현명해지도록 돕고 싶다는 생각도 없었다. <중략> 그는 가정과 결혼의 행복에 대해 무두장이가 위엄 있게 이야기하던 것을 떠올리며 조금은 비웃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행복이나 미덕에 대해 자랑하고 뻐길 경우, 대부분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p.68

"그래. 하지만 난 또 다른 생각이 들기도 해. 가장 아름다운 것이란 사람들로 하여금 즐거움뿐만 아니라 슬픔이나 두려움도 항상 함께 느끼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왜 그렇지?"

"무슨 말이냐면, 정말로 아름다운 소녀가 하나 있다고 해봐. 만일 지금이 그녀가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고, 이 순간이 지나고 나면 그녀가 늙을 것이고 죽게 될 것이라는 점을 모른다면, 아마도 그녀의 아름다움이 그렇게 두드러지지는 않을 거야. 어떤 아름다운 것이 그 모습대로 영원히 지속된다면 그것도 기쁜 일이겠지. 하지만 그럴 경우 난 그것을 좀더 냉정하게 바라보면서 이렇게 생각할걸. 이것은 언제든지 볼 수 있는 것이다, 꼭 오늘 보아야 할 필요는 없다고 말야. 반대로 연약해서 오래 머무를 수 없는 것이 있으면 난 그것을 바라보게 되지. 그러면서 난 기쁨만 느끼는 게 아니라 동정심도 함께 느낀다네"


p.70

두 사람이 여전히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해도 그 사이에는 언제나 깊은 심연이 입을 벌리고 있으며, 그 심연은 오직 사랑으로만 간신히 건너갈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을 그떄까지 경험해 보지 못했었다.


p.71

계획하고 생각한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야. 사실 사람들도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거든. 실재로는 바로 자신의 마음이 원하는 대로 매순간 아주 무분별하게 행동한다구. 친구가 된다거나 사랑에 빠지는 경우가 아마도 내가 말한 경우에 해당되겠지. 하지만 결국 모든 사람은 자신의 몫을 철저히 혼자서 지고 가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수는 없는 거야.


p.133

"이 철부지야, 이 모든 일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아직도 모르겠느냐? 네가 근심 걱정 모르는 방랑자가 되어 이곳저곳에서 어린아이 같은 행동과 어린아이의 웃음을 전달해주어야만 했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겠니? 그래서 세상 곳곳의 사람들이 너를 사랑하기도 하고 조롱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너에게 고마워하기도 했다는 것을 모르겠니? "

"하지만 그것도 모두 제가 아직 젊었을 적, 옛날 이야기 입니다! 전 왜 그것들로부터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고, 또 훌륭한 인간도 못되었을까요? 시간이 충분히 있었는데 말입니다"

"이제 그만 만족하거라. 한탄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 모든 일이 선하고 바르게 이루어져 왔고 그 어떤 것도 다르게 되어서는 안되었다는 것을 정말 모르겠니?"


p.135

크눌프가 한 번 더 눈을 떴을 때는, 해가 빛나고 있었는데 그 빛이 너무나 강렬해서 그는 재빨리 눈을 감아야 했다. 그는 자신의 손 위로 눈이 무겁게 쌓여 있는 것을 느꼈고 그것을 털어내려고 했다. 하지만 잠들고 싶다는 의지가 그의 다른 어떤 의지보다도 강렬해지고 있었다.


헤르만 헤세가 애정을 담아 그려낸 크눌프.


책을 덮고 난 후, 나 또한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삶 속에서 크눌프가 잊혀질만 할 때 다시 책을 펼쳐 읽어보아야 겠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