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시간아 흘러라, 나를 데리고.

by 달숲

샤워를 하거나 산책을 할 때, 가끔씩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한다. 글로 쓰면 꽤나 재밌겠는데? 마음이 급해져 얼른 기록해야지 싶다가도 돌연 식어버려 한 글자도 뱉어내질 못한다. 그럴 때면 소파에 벌러덩 누워 '글은 무슨 글이냐. 잠이자 자자.'라고 생각의 흐름을 꺾어버리곤 한다.


엑셀을 신나게 밟다, 급정거하는
마음의 주인으로 살아온 지
30년 하고도 7년


사람의 체온처럼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온도로 살아가고 있다. 어쩌면 작년보다 더 시니컬해진 것 같기도 하고, 꾸준히 게을러지는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 해도 어느 때로도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저 앞으로만 나아가고 싶다. 어쩌면 부모님이 돌아가신다면, 우리에게 그날이 온다면 함께했던 과거의 시절로 돌아가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오로지 한쪽으로만 흘러간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자연의 무심한 상냥함이라 생각하기에 나로서는 한 가지를 소망할 수밖에 없다.


나의 몸이 바스러지는 그날까지
흐르고 흘러라, 시간아.


인생의 가장 큰 미스터리, 그건 어쩌면 탄생일지도. 삶이라는 것을 정녕 내가 원했던가. 이는 의식이 있기도 전에 이미 덜컥 주어진 것이 아니던가. 그래서 늘 어리둥절했고 혼란스러웠다. 간혹 가다 행복한 날도 있었으나 어리숙한 인간에게 그것은 찰나와 같았고, 견뎌야 할 지지부진한 하루는 무한대처럼 끊임없이 이어졌다. 와중에 끊임없이 의미를 찾았으니 참으로 열심히 헛수고 한 세월이었다. 공회전을 하다 하다 결국 시동이 꺼진 인생이랄까. 와중에 많이 울고 웃었다.


나는 비관적인가? 죽고 싶은가? 글쎄. 그보다는 살아야 할 이유가 딱히 없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아, 물론 지금 인생이 몹시 우울해서 죽을 지경 뭐 그런 건 아니니 걱정을 거두어주길 바란다.


그저 삶이란 것이 너무나도 공허하고 나 자신은 또 몹시 유약해서 말이다. 그런 상태로 바스러질 것 같은 하루하루를 살다 보니, 앞으로 통과해야 할 날들이 거대한 빈 공간으로 느껴지면서 못 견딜 것 같은 그런 느낌을 얼핏 설핏 받는다고 말한다면, 당신의 표정은 어떠려나.


이런 류의 이야기는 대화로 나누기 곤란하므로 언제나 글의 형식을 빌려 물꼬를 튼다. 사실 솔직히 말하자면 언젠가부터 브런치에 속마음을 드러내기가 조심스러워졌다. 친구와 지인이 이따금 안부를 묻듯 이곳에 방문해 업로드된 글을 읽기 때문이리라. 다정한 그들의 방문에 되려 손이 무거워지는 것은,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고 싶지 않다는 마음과 언제 어디서든 '괜찮은 나'를 보여주고 싶다는 허영심 때문이다.


그럼에도 가슴이 건네는 말을 계속해서 외면할 수는 없다. 재채기와 가난처럼 나에게 글은 숨길 수 없는 것이기에. 그러므로 이렇게 마음이 이끄는 날에는, 순순히 자백하는 죄수처럼 가슴속에 있는 글자를 생각의 바닥까지 말끔하게 싹싹 긁어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비로소 자유로워지고, 마음의 상처가 소독된다. 진정한 치유는 외부에 있지 않고 글을 쓰는 자신의 두 손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늘도 냅다 본문부터 써놓고 본다. 제목은 글을 발행하기 전에 쓰면 될 일이다. 너덜너덜 해진 마음이 조각보처럼 이어지는 것을 느끼며 오늘을 써 내려간다. 문단과 문단을 잇다 보면 살아갈 힘을 얻는다.


연이은 무더위와 자연재해로 이곳저곳에서 사망 소식이 전해진다. 나 자신의 삶의 이유를 찾지 못했으면서 다른 사람들이 잘 살아가기를 바라는 이 마음. 이토록 삶에는 모순이 가득하다. 그럼에도 결국 나를 웃게 해 주는 것은 늘 삶 속에 있다.


삶은 한쪽으로 흘러가게 되어있으며, 마르지 않을 것 같았던 시간의 흐름은 언젠가 끊기게 되어있다. 그때까지 삶은 계속해서 흔들릴 것이나 비틀릴지언정 계속해서 나아갈 것이다.


그러니 시간아 흘러라, 나를 데리고.


Photo by Bruno Martins on Unsplash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눈물 뒤에 맑은 하늘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