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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뒤에 맑은 하늘이 온다.

by 달숲
Photo by Inyoung jung on Unsplash


비 온 다음날 하늘은 맑고 파랗다. 실컷 울고 난 삶도 평화로운 한때를 맞을 준비가 되었다.


이번 달 초에는 킥복싱을 등록했다. 운동을 하기는 해야겠는데 요가도 헬스도 다 재미를 붙이지 못했으니 이번에는 좀 더 과감한 운동을 해보자 싶었다. 운동을 다녀올 때마다 벽에 붙여놓은 포도송이에 포도알을 하나씩 붙이고 있는데, 제법 탐스러운 포도송이가 만들어지고 있다.


천성이 게을러서 이렇다 할 운동에 재미를 붙이지 못했다. 그러나 인생의 경험은 인간을 변화시키는 법. 이별 후에 마음 둘 곳이 필요했는데 참 잘한 일이라 생각한다. 헤어짐 덕분에 운동을 일상에 안착시켰으니 이별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구나. 어쩌면 나에게 꼭 필요한 시련이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하다. 요즘엔 정말 더 나은 미래가 두 팔 벌려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오늘처럼 하늘이 높고 맑은 날에는 저절로 그런 생각이 들면서, 다 괜찮을 것만 같다.


분명 나는 좋아지고 있다. 무엇이 좋아지고 있냐 물어본다면 딱히 할 말은 없지만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내일 무슨 일이 닥칠지 모를 인생이기에 지금 이 순간을 좀 더 즐기는 게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기도 하고. 제법 여유가 생긴 건지 일상 속에서 자주 웃기도 한다. 이는 모두 슬픔과 기쁨을 함께해 준 가족 덕분이다. 결혼에 대한 필살 다짐도 많이 누그러들었다. 이제는 뭐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생각해 보면 혼자면 혼자인대로, 함께면 함께인 대로 좋은 것이 건강한 삶이자 좋은 인생 아닐까? 게다가 지금은 부모님이 건강하게 곁에 계시고 하니 더 바랄 게 없다.


얼마 전 지인 작가님의 조언을 따라 엄마의 집안일을 조금씩 도와드리고 있다. 이 세상 누구보다 엄마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집안일을 돕는다고 하면 두 손 두 발 젓는 엄마가 내가 아는 엄마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집안일을 도와주겠다고 다시 말하니 머쓱해하며 고마운 표정을 짓는다. 특히 고마워하는 건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는 일. 집 밖을 나설 때마다 딸내미 두 손에 쓰레기를 쥐어주며 미안해하는데, 이걸 엄만 평생 하셨잖아요? 이런 걸로 엄마를 미안하게 만드는 딸이 되어 되려 죄송스러울 뿐이다. 덕분에 우리 모녀의 일상이 동글동글 반짝이는 조약돌처럼 둥그스름해졌다. 참 좋은 날이다.


어릴 적엔 엄마에게 왕방울 다이아몬드를 사준다고 큰소리치는 딸이었는데. 여전히 나는 그럴만한 경제력을 갖추고 있지 않다. 하지만 오늘처럼 싱긋한 바람이 부는 좋은 날이면 생각도 부들부들 포근해져서 그런 날이 결국에는 올 것 만 같다. 엄마와 아빠에게 받은 사랑, 이제는 내가 부모님께 듬뿍 드리고 싶다.


사랑은 돌고 돌아
다시 내게로 돌아온다.

어쩌면 부모님처럼 내리사랑을 줄 자신이 없어서 그동안 자식을 낳지 않겠다고 말해왔는지도 모르겠다. 고난을 극복할 힘이 나에게 있을까, 무한한 사랑을 줄만한 깜냥이 있는가에 대한 답을 내리지 못했기에 출산은 언제나 상상 밖의 영역이었다. 그런 이유로 지금까지 만난 연인들에게 아이를 낳고 싶지 않다고 줄곧 선언해 왔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30대 후반의 고가도로를 달리고 있는 이 마당에, 심지어 이별을 겪은 이 시기에, 책상에 앉아 보사노바 음악을 들으며 어쩌면 아이를 낳아도 괜찮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남자친구도 없고 썸도 없고 쥐뿔도 없는 상태에서 말이다. 세상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생각의 흐름은 계속해서 이동하므로 언젠가 이 생각이 바뀔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이미 노산인터라 임신은 더 이상 선택사항이 아닐지도. 그럼에도 왠지 그런 생각이 드는 날이 있다. 나는 결국 행복해질 것이고, 원하는 것은 씨앗이 뿌려져 있으니 앞으로 그렇게 될 일만 남았다고. 희망이 차곡차곡 쌓이는 그런 날. 그러니 산책하듯 그 생각을 거닐면 된다.


나는 무엇이 될까?


10대 때에도, 20대 때에도 하염없이 하던 그 생각을 30대가 되어서도 하고 있다니. 죽는 날까지 지겨워하지도 않고 나는 계속해서 이 생각을 할 테다.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 호호호 웃으며 살아있기를 참 잘했다고, 그간 애썼다고 생각할 테지. 비가 한참 내리고 난 뒤의 생각은 이다지도 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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