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하는 엄마의 정기검진으로 방문한 종합병원. 대기자 모니터에는 낯선 이의 이름이 잔뜩 적혀있고 두 번째 줄에는 익숙한 이름이 다소곳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꽉 닫힌 초음파실 문 옆엔 정수기가 있고 그 옆으로 벽을 따라 의자가 길게 늘어져 있다. 의자마다 호명을 기다리는 지루한 표정의 환자들로 가득하고 나 역시 그 틈에서 심드렁하게 핸드폰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한 남성의 목소리가 귓전을 건드려 고개를 들어보니 한 아들과 늙은 아버지가 시야에 들어온다.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아버지에게 닿으려는 중년의 아들이 조용한 복도를 쩌렁쩌렁 울리고 있었다. 아들은 60대정도 되었으려나. 자신의 이야기가 라디오 사연처럼 사방팔방 전달되고 있는데 정작 본인은 대화에 심취해 의식하지 못하는 듯했다.
흥미가 생겨 찬찬히 들어보니 요는 이러했다. 근래 들어 아버지가 거스름돈을 잘못 돌려받는다던가(5만 원권을 내고 터무니없는 잔돈을 거슬러 받은 듯했다), 할머니에게 생활비를 줬는지를 기억 못 한다던가(아들은 돈을 얼마나 자주 주는지, 마지막에 준 것은 언제였는지를 채근하듯 물었다) 평소와 다른 아버지의 행동에 의문을 가진 아들이 작심하고 치매진단을 받으러 온 것이다. 아버지의 반응이 영 뜨뜻미지근하자 아들의 목소리는 되려 더 커지고, 확성기 같은 입이 노인의 귀에 닿을 지경이다. 고개를 돌려 보지 않아도 그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음을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정도다. 반면, 안개 낀 숲 속의 얼굴로 멍하니 정면만 응시하는 할아버지. 부자의, 아니지. 아들의 일방적인 대화는 간호사의 호명에 돌연 종료되었다. 나 역시 얼마 안 가 엄마의 진료가 끝나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어쩐지 병원에서의 모습이 둥둥 떠다니고 순한 양이 되어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던 환자들의 얼굴이 아른거린다.
병원이란 공간은 서점과도 같아서 읽히지 않은 인생이 수북이 꽂혀있다. 이곳에서 타인의 삶을 엿보고, 인생이란 무엇일까란 해답 없는 질문을 조용히 되새김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