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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두치 Oct 29. 2021

죽고 싶을 때면 일기장을 펼쳐보곤 했다

#6 나는 어떻게 좋아하는 것을 잃었었나


누군가 20대의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망설임 없이 일기장이라고 답했을 것이다.

삶의 고비에서 언제나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줬던 일기장이 있었기에 잘 살아올 수 있었다.





나는 죽고 싶을 때면 일기장을 펼쳐보곤 했다.

‘어제, 한 달 전, 일 년 전, 10년 전의 내가 이랬나.’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애써 살아온 흔적들을 톺아보고 힘을 받는다.

가족도, 동료도, 친구도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는 막막함이 차오를 때면 과거의 나는 어떤 방식으로든 응답해줬던 것 같다.


텔레비전의 재난 대응 지침을 보면서도 통장보다는 먼저 일기장을 가져가야겠다 생각하곤 했으니 일기장은 내게 오래된 친구 같은 소중한 존재였다.





그런데 꼬박 11년째 일기를 쓰던, 30세가 되던 해

가장 소중했던 일기장을 모두 태워버렸다.


일기장 보다 더 소중한 사람이 생겼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혼자였던 내게 그 사람의 등장은 사건이었다.


나는 이제 더이상 혼자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10년의 무의식과 온갖 감정의 쓰레기가 담긴 판도라의 상자를 그 사람이 열어보게 되었고, 나는 그를 잃을 위기에 처해버렸다.


나는 그 사람을 잃을 위기 속에서 죽음의 고비를 넘겨야했고

그때의 나는 이 갈등의 원인이 된 일기장을 모두 태워버려야 우리 관계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일기를 끊게 되며 글 쓰는 삶은 종료됐다.



무슨 인어공주인가

목소리를 잃은 대신 두 다리를 얻은 인어공주처럼

반려하는 사람을 얻었지만 나는 일기를 잃어버렸다.





글을 쓰지 않아도 내게는 곁에 있는 사람이 있었고, 외롭지 않다고 생각했다.

처음엔 그 사람을 사랑하고 함께하며 모든 것을 가진 것 같았다

혼자인 삶이 괴로웠고 그것이 종료된 것 같았다

그래서 더 이상 일기를 쓰지 않아도 살아갈 힘이 생겼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또한 큰 착각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끊이지 않는 갈등의 소용돌이에서 허우적 됐고 다시 죽음의 문턱에 섰다.



더 이상 글을 쓰지 않으면
내가 진짜 죽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다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기장과 나의 관계는 좀 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이제는 다시 누군가가 내 일기장을 볼 수 있다는 두려움이 생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일기장이 필요했고,

자물쇠를 채워보기도하고

나도 못알아보겠는 언어를 가지고 계속 일기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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