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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이 지운 서아프리카 예술의 가치

사라지는 전통과 만딩카 문화의 뿌리

by 두치




사라지는 코라의 자리

감비아에 오기 전 백인이 만든 앱으로 코라를 배웠다. 그러다 보니 본래의 전통과 뿌리가 궁금했다. 코라는 만딩카 젤리 문화에서 핵심적인 악기다. 코라의 뿌리를 이해하는 것은 만딩카 문화와 만데 예술을 이해하는데 중요하다 느꼈다.


감비아에 온 지 3주째쯤, 전통 코라를 보기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곳에 있는 동안 매일 전통적으로 코라를 연주하는 사람을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이미 코라가 연주되는 형식이 돈이 되는 공연 밖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전통 코라를 치는 장소도 거의 다 사라졌다는 것을 알았다. 그나마 10년 전까지는 감비아에 전통 음악을 공연하는 레스토랑들이 네다섯 개 있었다고 한다. 이제는 전통 코라를 가끔 연주하는 곳이 반줄에 단 한 곳밖에 남지 않았다.


포스트 식민 시대에 서아프리카의 많은 젤리들이 보컬에 마이킹을 하고, 근대화된 음악과 악기를 더 급진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면서 코라의 자리가 서서히 줄게 됐다. 서아프리카 현대 만데 음악 보급에 큰 영향을 미쳤던 기니발레단, 그 발레단을 주도했던 사람 중 한 명인 칸테 파셀리가 만딩카 음악에서 코라를 빼고 일렉기타나 퍼커션 중심의 음악을 구성하며 현대 만데 음악의 형식이 변화하게 됐다.


감비아에서는 현대 음악뿐만 아니라 이미 삶에서도 코라의 자리가 많이 사라졌다. 만딩카 사람들이 태어난 지 7일째에 하는 네이밍 세리머니(ngenteh)에서도 코라와 춤을 보기 힘들다. 해가 지고 저녁이 되면 사람들이 모닥불을 에워싸고 둘러앉아 코라를 연주하며 역사를 배우고 이야기 나눴던 수무(옵)도 식민지배 이후 사회 구조가 급변하며 대부분 사라지게 됐다. 모닥불이 사라진 자리에 핸드폰이 생겼고, 사람들은 젤리의 코라보다 틱톡의 음악을 더 듣게 됐다. 그렇게 과거의 코라는 이미 거의 다 사라졌다는 것을 알았다.


산잘리 작업실 한켠에 있는 초상화


아버지는 저작권료, 돈
그런 거 하나도 못 받았어
어느 날 백인이 와서 (아버지의 음악을)
그냥 녹음해 간 거야

계약서? 없어.
난 지금도 그 돈 누가 가져가고 있는지 알아

그래서 아버진 우릴 걱정했어.
우릴 공부시키려고 했지
코라 말고...
내 형제들 모두 의사나 변호사가 됐어

아버진 내가 이렇게 될 줄 상상도 못 하셨지

식민주의는 어디까지를 파괴하고 앗아간 걸까. 나는 코라뿐만 아니라 젤리 자체가 이미 전통적인 방식으로 살 수 없는 토대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너무 순진했다. 전통 예술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전통이 당연히 살아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니..


이미 사라졌고 또 지금도 사라지고 있는 것들은 무엇일까. 백인들이 서아프리카의 많은 것들을 앗아간 것뿐만 아니라 역사와 예술까지도 조작하는 걸 보면서 무엇을 믿고 배우며 따라가야하나 혼란스러워졌다.




나는 답답한 마음에 각종 문헌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결국 공부 끝에 서아프리카 전통이 식민지 시대와 근대화를 거치며 급격히 다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음악과 춤이 이미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 외에도, 많은 청소년들이 전통 연구를 포기하게 됐다. 음악과 춤의 전수가 중단되며 잃어버린 것들은 이제 영원히 구할 수 없는 것이 됐다. 나야말로 백인 사회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만데 전통을 더 깊이 보고 배우고 싶었다. 하지만 많은 것들이 이미 다 사라졌다. 너무 슬프다. 이렇게 쉽게 수천 년의 역사가 끊어질 수 있는 건가. 그만큼 제국주의의 만행이 잔인하다 느낀다.





연말이 되자 산잘리에게 한 레스토랑이 기도를 부탁했다. 산잘리는 연말 공연을 위해 만딩카 탄탕오(퍼커션)와 칼라바스를 포함한 베이시스트와 협연을 했다. 그런데 숙련된 베이시스트나 젤리가 없어서 몇 번이나 세션 멤버를 다시 구성해야 했다. 산잘리는 "감비아에 미국 것이 확~ 들어온 이후로 사람들이 랩이나 하고 좋은 차에 커다란 체인 목걸이만 찰라고하지 제대로 된 베이스 플레이어 하나 찾기 어렵다"했다. 사람들이 음악만으로 살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며칠 전 이곳에서 30년 가까이 살고 있는 일본인 나오상의 라디오를 들었다. 앞집에 사는 부부가 유럽으로 가는 난민 보트를 탔다가, 그 보트가 바다로 가라앉아 운명을 달리했다는 소식이었다. 나오상은 그렇게 매일 감비아에서 보트를 타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나오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갑자기 내가 살고 있는 켐부제의 풍경이 생경하게 느껴진다.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보트를 탄다. 세상이 어쩌다가 이렇게 생겨먹게 된 걸까.


아무튼 산잘리는 공연 직전날 까지도 세션 문제로 골머리를 앓다가 당일날 기도(공연)를 결국 말아먹었다. 베이시스트는 제대로 연주를 하기 어려워했고 사람들은 아무도 코라 연주를 좋아하지 않았다. DJ가 틀어주는 쿠페데칼레에는 모든 사람들이 나와 춤을 추고 환호성을 질렀지만, 산잘리 밴드가 연주를 시작하면 모두 자리로 돌아가 유령이 된 것 같았다. 이런 관객의 반응을 보고 카페 주인은 산잘리에게 준비한 곡을 다 연주하지 않아도 된다 했다. 나는 산잘리와 밴드 사람들이 그동안 했던 노력들이 생각나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세구 아트 센터에 걸려있던 어느 젤리의 사진


나는 백인들이 좋아하는 방식이나
음반을 위한 방식으로
코라를 연주하지 않는다
우리의 전통 스타일이 있다


산잘리의 말이 맞다. 애초에 카페 주인이 산잘리 밴드의 구성을 전통이 아닌 현대의 방식으로 요구했던 것 자체가 문제라 생각한다. 코라는 전통적으로 두 개의 앙상블로 연주되는 것이 가장 아름답다. 나는 그런 전통 음악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는 카페 주인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근본적으로는 카페 주인이나, 전통 코라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애초에 삶의 구조자체가 이전과 달라졌다. 그래서 돈이 좋아하지 않는 ‘지루한’ 코라는 살아남기 힘든 것이다.


그런 사회에서 산잘리는 여전히 전통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나는 산잘리가 매일 불같이 화를 내는게 더 깊이 공감이 됐다. 산잘리는 내게 코라를 연습하라 할 때, "기도하러 가라" 말한다. 코라를 연주하는 것은 기도하는 것이다. 항상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는 코라를 연주하는 산잘리를 생각하면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가혹하게 느껴진다.




소비하는 예술을 넘어:

제국이 지운 음악과 춤의 가치

점심먹고 두런두런 둘러 앉은 젤리 쿤다의 풍경


어느 날 오후 산잘리는 내게 공연이나 워크숍을 위해 노르웨이를 30년간 오가고, 유럽 등의 많은 나라를 다니며 느낀 것에 대해 말해줬었다.


(돈이 많은 나라의 사람들은)
돈으로 노래를 살 수 있다 생각하는데, 그건 이상해
그런 나라들엔 유흥 entertain은 있지만
음악과 사람들 간의 관계는 없어
음악을 소비하지
그냥 무대를 보고 돌아서면 끝이야

나는 산잘리의 말에 "돈은 무언가를 주는 것 같지만 실은 앗아가기도 한다"라고 답했다. 산잘리는 낮은 목소리로 "응~" 소리를 내며 고개를 격하게 끄덕거렸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산잘리가 말한 그 관계의 의미를 더 깊이 알고 싶다. 내가 주로 살고 있는 한국도 산잘리가 말하는 곳들과 비슷한 환경으로 음악을 소비한다. 나를 포함한 한국 사람들에게 음악은 삶의 중요한 안식이다. 하지만 음악을 소비하는 것과 음악과 관계 맺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내 삶을 먼저 돌아보자면,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음악은 중요했다. 음악이 없었으면 이미 죽었을 거다. 하지만 동시에 내가 본 많은 대부분의 공연들이 어떤 의미가 있었나 생각하게 된다. 그 순간을 의미 있게 해 주고 일시적인 진통제 역할을 해줬지만, 돌아서면 대부분은 내 삶과 상관없는 것이 된 것도 사실이다.





서구 사회에서는 음악과 춤을 공연 예술이나 오락으로만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만딩카 문화를 예를 들면, 그들의 춤/음악의 원리는 철학, 언어, 종교, 교육 기관, 시각 예술 등 사회의 다양한 요소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따라서 춤과 음악 시스템 내의 문화적 원칙을 단순히 춤/음악의 세계에만 국한된 의미로 해석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춤을 사회적 경험의 다른 측면과 연결하여 해석할 때, 특정한 동작이 농경 춤(예: 카사(Kassa))에서 씨를 심는 행위를 나타낸다거나, 축제 춤(예: 쿠쿠(Koukou))에서 즐거움을 표현한다는 등의 좁은 시각에서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동작이 해당 사회 전체가 농경, 축제와 같은 삶의 중요한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반영한다는 점이다.


이는 곧 그 사회가 지구. 우주와의 관계를 어떻게 인식하는지와 연결된다. 근본적으로 춤의 동작은 사회 구성원들의 일상생활을 지배하는 보편적인 개념과, 조상들의 세계에서 삶을 바라보는 관점을 상징한다. 즉, 춤의 동작은 그들의 세계관을 나타낸다. 따라서 이러한 춤 동작 속에 내재된 이념들은 사회와 삶의 다른 영역에서도 끊임없이 반복되거나 목격될 수 있다. 결국 춤은 그렇게 문화를 통합하는 역할을 한다.(1)




만딩카 사회에서 춤은 ‘냐마’(nyama, 우주적 힘)을 다루는 방식과 연결된다. 냐마는 만딩카 사회에서 우주를 움직이는 힘이자 존재의 근원이다. 이 힘은 만데 제국 이후 순자타의 헌법이 제정되며 '장인 계층'만이 지닌 힘으로 간주됐는데, 장인들은 이 힘을 춤과 음악을 통해 다루거나 전달하곤 했다. 다시 말해, 춤과 음악은 단순한 표현 수단이 아니라 우주의 질서에 참여하는 행위, 존재론적 실천이다.


춤은 본래 젤리, 가죽 세공사, 연령 등급 체계, 비밀 결사(secret societies) 등 여러 단체의 일부로 존재했지만, 이후 독립적인 예술 분야로 발전했다. 그러나 춤이 독립된 예술 형태가 된 이후에도, 춤을 추는 사람들은 냐마를 지닌 존재로 간주되어 경외와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만딩카의 춤은 전통적으로 주술적 실천과 연결되어 있다. 장인들은 단순한 예술가, 노동자가 아니라 '냐마'를 다루는 비의적 존재다. 음악과 춤은 주술, 제의, 성년식 등에 필수적이며, ‘영적 에너지’의 통로 역할을 한다. 따라서 만딩카 문화에서 춤과 음악(춤 체계)은 신성과 인간을 잇는 종교적 매개체기도 하다.


또한 만딩카 사회는 세대를 넘어 지식과 기술을 계층적으로 전수해 왔다. 이때 춤과 음악은 전달 방식 자체였다. 예를 들어 성년식에서의 춤은 사회적 역할과 책임을 체화시키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음악을 통해 전해지는 지식은 구술적이며, 리듬과 몸짓을 통해 몸에 기억되고 반복된다.


말리 제국은 연방 체제로 운영되었으며, 각 지방은 자치권을 가졌다. 지방마다 유전적으로 세습되는 총독이 존재했으며, 이들은 재판관 역할도 수행했다. 하지만, 모든 결정은 마을 원로회의와 지역 추장의 동의를 받아야 했다. 마을 사람들의 동의 없이 어떠한 판결도 실행할 수 없었으며, 전통적 종교를 믿는 다수가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 참여했다. 모든 전통적 결정은 반드시 춤과 음악을 통한 의식으로 확인됐다.


또한 서아프리카 세네감비아 대지역의 춤과 음악은 초기 국가들과 비국가 정치체들의 지속성과 문화적 정체성 유지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만큼 춤과 음악이 삶에서 중요했기 때문에 사람들 이름뿐만 아니라 국가나 마을까지도 북에서 들리는 소리대로 이름을 지었다. 삶과 정체성은 춤과 음악에 의해 밀접히 형성되고 규정됐다. (2)


만딩카 사람들의 전통적인 삶의 양식에서 제국과 근대화는 서서히 그 뿌리를 뽑아나갔다. 그렇게 춤과 음악의 자리는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산잘리와 함께했던 또 다른 어느 날 오후가 생각난다.

그날은 점심을 먹고 커다란 시디플레이어로 산잘리의 음악을 들으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 대화는 대부분 사라지고 착취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들이었다.

그날은 오후 내내 마당에서 같이 소리치고 화를 내며 울고 또 울었다.


“아프리카가 없으면 핸드폰도 노트북도 없어!”,

“Enough is enough! 그만 죽여, 그만 착취해”,

"퉁아 tunga, 길을 떠나면 모두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알게 되는 거야"






가장 소중한 것들이 매일 사라지고 있는 것을 느낀다.

고통엔 말이 없다.

그냥 몸을 열고 감각할 뿐이다.

소리 없이 사라지는 소중한 것들을 느낀다.

무술리 까실라 비보라베
바브라베 말리사 판디야데 칼리마
사랑으로 뭘 하려고 하지 마
깨끗한 마음이 사랑이야
사랑엔 목적이 없지
-젤리야 노래 중 가사의 일부-

사람들은 그냥 코라만 배우고 싶어 해
그러면 나는 그냥 코라만 가르쳐
그게 사실 가장 쉬워

난 비행기 타고 여기저기 안가
여기서 전통을 지켜야지
그래도 너를 위해 특별히 한국은 갈게

너에게 진심으로 감사해


난 침 튀기며 화내는 이 할아버지가 참 좋다.

이 할아버지가 오래오래 변함없이 이곳에 살아주면 좋겠다.

망고나무 아래, 쓰고 단 아타이어(녹차)와 꾸벅꾸벅 졸면서 듣는 코라, 징그러운 삶 그래도 사랑스러운 사람들과 함께 보낸 그날의 오후를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 같다.



춤과 음악 전통이 세네감비아 대지역((Greater Senegambian region, 기니, 기니비사우, 말리, 세네갈, 감비아)에서 사라진 역사적 과정

서아프리카, 특히 세네감비아 대지역에서 전통, 특히 춤과 음악 전통이 사라진 데에는 여러 역사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먼저, 지역 내부의 온건한 토착 노예제는 문화와 춤 체계의 연속성을 허용했으나, 아랍 노예제와 사하라 종단 노예무역을 거쳐 대서양 노예무역으로 이어지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대서양 노예무역은 특히 파괴적인 형태로, 춤과 전통의 창작, 전승, 보존 체계를 심각하게 훼손했다. 문화 실천자들이 대거 미주로 강제 이송되거나 사망하면서, 문화의 핵심 인력이 사라진 것도 중요한 원인이었다.

고대 가나 제국 시기 (11세기)
이 시기에는 종교적 분화가 일어나면서 일부 숲과 공간이 신성한 보호 구역으로 지정되었다. 이로 인해 특정 종교 의례에 사용되던 춤과 음악 전통이 일반 대중으로부터 격리되며, 접근과 실천이 점차 제한되었다.

아랍 노예제 도입 이후 (7세기~)
사하라 종단 무역과 함께 이슬람화가 진행되면서, 독립적으로 활동하던 춤과 음악 실천자들이 노예화되어 지역 외부로 이송되었다. 이로 인해 그들이 전승하던 전통도 함께 사라지거나 약화되었다.

대서양 노예무역의 전개와 심화 (15세기 이후 ~ 19세기)
가장 결정적인 변화는 대서양 노예무역의 확장이었다. 15세기 이후 포르투갈에 의해 무역 중심이 내륙에서 해안으로 이동하면서 전통 무역망과 함께 네트워크를 붕괴시켰다. 노예무역 중심의 경제 구조는 지역 문화의 기반을 더욱 약화시켰다. 농업과 치유, 공동체 의례와 연결된 다양한 춤과 음악 전통이 무차별적인 인간 사냥과 강제 이주로 인해 사라졌다. 특히 전쟁, 납치, 마녀사냥, 거짓 고발 등으로 인한 문화 실천자들의 대량 상실은 창작과 전승의 구조를 무너뜨렸으며, 지역 사회 자체가 파괴되어 문화의 세대 간 전승이 어려워졌다.

전반기 전체에 걸친 인구 유출과 강제 이주
오랜 시기에 걸쳐 이루어진 강제 이송과 인구 유출은 춤과 음악 실천자, 장인, 이야기꾼 등 문화의 핵심 인력을 지역에서 소멸시켰다. 이는 전통의 단절과 문화 기억의 손실로 이어졌다. 노예사냥을 피해 공동체들이 습지, 늪지, 절벽 등 외딴 지역으로 피신하면서, 공개적으로 행해졌던 춤과 음악 의례는 더 이상 지속되기 어려워졌다. 전통은 은밀하게 이어지거나, 아예 중단되기도 했다.

식민주의는 여러 방식으로 아프리카에 영향을 미쳤다. 자원과 인간 자원, 교육 시스템과 정치 기관이 영향을 받았다. 문화와 정신적 시스템도 예외는 아니었다. 식민주의 역시 춤의 창작과 전승에 장애물을 만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전통은 살아남았다. 특히 통과의례로 기능한 연령 등급 문화는 대부분의 공동체에서 보존되었고, 외딴 지역으로 피신한 일부 공동체는 만딩카 춤/음악 체계를 지키며 문화적 생존을 도모했다. 그러나 임금 노동과 유럽 중심의 경직된 학교 교육을 강조하는 현대성은 많은 춤을 사회적 경험의 중심에서 주변부로 밀어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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